시와 憧憬

김남주, 「추석 무렵」(낭송 최광덕)

cassia 2011. 9. 12. 15:29
    김남주, 「추석 무렵」(낭송 최광덕) 김남주, 「추석 무렵」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덩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시_ 김남주 -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으며,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하여 3선개헌 반대운동과 교련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앞장섬. 이후 고향 해남에서 농민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기 시작했으며 1974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서 「잿더미」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았고 9년째 복역 중 1988년 12월 가석방 조치로 출소. 그 다음해 1989년 1월에는 고은 시인의 주례로 그의 오랜 동지이자 약혼자였던 박광숙 씨와 결혼했으며 열정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함. 그러나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은 병으로 1994년 2월 13일 작고함. 시집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시선집 『사랑의 무기』가 있고 옮긴책으로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프란츠 파농), 『아타 트롤』(하이네) 등이 있음. 낭송_ 최광덕 - 배우. 〈만다라의 노래〉, 〈맥베드21〉 등 출연. 출전_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비) 김남주, 「추석 무렵」을 배달하며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나던 날을 기억합니다.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빈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먼저 간 그를 위해 잔을 채우고 비웠습니다. 꽃 한 송이 드리고 향 하나를 사르고 추운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제 귀에 사무쳐온 것은 「이 가을에 나는」「추석 무렵」같은 시들이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더 많이 읽히던 시는「조국은 하나다」 같은 전율이 이는 투쟁의 시들이었지만. 시인이 온몸과 온 마음을 바쳐 시대의 불의에 저항해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대지에 대한 극진함과 사람살이의 소소한 행복에 민감한 따뜻한 서정이 있었던 때문입니다. 가열찬 전사의 시와 들판을 걷는 서정의 시가 둘이 아니었던 거예요. 지극한 마음이면 무엇을 노래하든 통하는 거니까요. 추석 무렵, 그가 꼭 저러한 풍경으로 고향 해남 들판을 아들아이 손을 잡고 걷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초승달이 자라 둥실한 보름달로 뜨는 원초적인 풍요의 미감이 이토록 적절한 들녘 풍경과 만나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하는군요. 대지와 사람살이의 기본에 대한 소탈하고도 유쾌한 응시는 전사 김남주의 내면을 채우던 고향이었을 겁니다. 그가 삶 전체로 세상의 불의와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소박한 일상의 풍요와 행복이 착취당하는 현실이 아파서였을 테니까요. 이런 사소한 풍경들이 지켜져야 삶인 거 아니겠어요. 문학집배원 김선우 / 출처 :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