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신동엽 부여 시비

cassia 2007. 4. 3. 06:03

백제의 숨결 속에

―신동엽 부여 시비―


  서울을 떠난 지 세  시간 십오 분 만에 부여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렸다.  일요 관광객이 꽤 붐빈다는 인상이었는데, 거리로 들어서니 옛 도읍 그대로의 조용함이다.  금강의 시인 신동엽(申東曄) 시비가 있는 나성지(羅城趾, 사적(史蹟) 제 58호의 토성(土城)터)까지는 택시로 기본요금의 거리라 걷기로 했다.  거리를 벗어나니 펼쳐지는 백제의 벌판, 예나 다름없이 벼가 누렇게 익고 있는 백제의 벌판이다.  그 들판을 열병(閱兵)하면서 백제교(百濟橋)에 다다른 것은 30분 지나서였을까.  장송(長松)이 우뚝우뚝 둘러 있는 솔밭이 충남 부여읍 동남리 나성지다.

  이 나성지 초입의 솔밭에 금강을 굽어보며 신동엽 시비가 서 있다.  그 뒷켠에는 우람한 ‘불교전래사은비(佛敎傳來謝恩碑)’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백제 26대 성왕(聖王)이 일본에 불교를 전하면서, 오늘의 일본 문화의 정화(精華)를 이룩하였다는 그 은덕을 기리고자, 일본 불교 전래 사은 사업회에서 세운 것.  그 주변에는 아베크족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다. 

  ‘우이여! 훠어이!’(<금강(錦江)>에서) 어디서나 새 쫓는 소리가 들려오는 <산에 언덕에>는 ‘그리운 그의 얼굴/다시 찾을 수 없어도’, ‘발자취가 선명하고 강열한 인상으로’(박두진) 남은 ‘민족시인’의 글이 돌에 새겨져 있으니…….


             산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 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뜰에 숲 속에 살아 갈지어이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 날지어이


  신동엽시비는 1970년 4월 18일 신동엽시비건립위원회에서 주관, 한국문인협회, 시인협회, 펜클럽 한국본부, 시극동인회, 조선일보사 등이 후원, 그의 1주기(기일은 4월 7일 임)를 기리며 제막식을 가졌다.  제막식에는 김동리(金東里), 박두진(朴斗鎭) 등 50여 명의 문인과 군수를 비롯한 지방 유지가 다수 참석하였고, 그날 저녁 부여예식장에서는 신동엽 추도 문학 강연회도 아울러 가졌다.

  그의 시비를 새긴 돌은 ‘1백여 리나 떨어진 보령(保寧)군 감포(藍浦)면에서 비 주석(主石)을 운반하고 부석(副石)은 화강석으로 했다’(《주간한국(週刊韓國)》에서).

  주석은 높이 123센티미터, 너비 32센티미터, 신동엽시비라고 씌어져 있고, 부석 비신은 높이 93센티미터, 너비 110센티미터의 마광(磨光)한 화강석, 그 화강석에 높이 46센티미터, 너비 66센티미터의 비판(碑板)을 끼워 시 ‘산에 언덕에’를 새겼고, 그 후면에는 높이 50센티미터, 너비 58센티미터의 비판을 끼워 그의 행적기를 새겼다.

  왼편에는 높이 103센티미터, 너비 39센티미터의 화강석 기둥을 주석비신에 기대어 세웠다.  그 측면에 ‘글씨 박병규(朴秉圭) ․ 설계 정건모(鄭健謨) ․ 조각 최석귀(崔錫龜)’라는 비판이 끼워진 비신을 4단으로 쌓은 화강석 대석으로 받혔다.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 501번지에서 신연순(申淵淳)의 장남으로 출생.

  1959년 《조선일보》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로 입선, 문단에 데뷔.  그의 시는 그의 작은 체구와 깐깐한 성격과는 달리 언제나 서사시적인 긴 호흡이 담겨 있었고, 민족사의 수난을 바탕으로 한 역사의식이 강하였다.  때문에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내가 야윈 건 내 조국의 마음이 착해서, 내 조국이 야윈 건 내 마음이 착해서다”라고 하였다.

  1963년 시집《아사녀(阿斯女)》를 상재.  1967년 펜클럽 작가기금으로 서사시 <금강>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

  김수영(金洙暎)은 <참여시와 신동엽>이라는 글에서 <아니오>, <껍데기는 가라>등을 예로 들면서 ‘신동엽의 걸작에는 우리가 오늘날 참여시에서 바라는 최소한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강인한 참여의식이 깔려있고, 시적 경제(經濟)를 할 줄 아는 기술이 숨어 있고, 세계적 발언을 할 줄 아는 지성이 숨쉬고 있고, 죽음의 음악이 울리고 있다’ 고  극찬하였다.

  ‘내일의 시인은 선지자(先知者)여야 하며, 우주 지인(宇宙知人)이 되어야 하며, 인류 발언의 선창자(先唱者)가 되어야 한다’는 그, ‘정녕 “하늘을 보았다 할” 시인이었고, 민족의 큰 설움을 가슴에 품었던 사람’ 인 그는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자택(서울 동선동 5가 46)에서 영면하였다.


  향년 서른아홉 살, 4월 9일 경기도 파주군 금초면 월룡산 기슭에 안장, 그해 12월 14일 묘소에 비를 세웠다.


               여행을 떠나듯

               우리들은 인생을 떠난다

               이미 끝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금강(錦江)>에서


  고 하더니,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떠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