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교실

어린이 논술지도 어떻게 할까

cassia 2007. 2. 4. 22:18

어린이 논술지도 어떻게 할까


토론을 두려워하는 아이들, 우리 사회와 역사 문제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 자기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 책읽기와 글쓰기를 너무너무 싫어하는 아이들, 더구나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왜 이런 아이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집과 학교, 그리고 학원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은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해오름에서는 이런 아이들에게 체계적인 독서와 논술 공부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도록 독서․ 논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논술이 골치 아픈 또 다른 공부이기보다는 우리 삶의 문제를 진지하면서도 흥미 있게 연구하고 가꿔가는 삶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을 이제부터 하나씩 알아 가도록 합니다. 아이들과 우리들 삶 속에서 출발하는 논술, 아이들 삶을 변화시키는 논술은 삶 읽기와 책 읽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논술이 왜 나왔을까?


논술이 나온 시대 배경

한 나라의 교육 제도는 그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질문 하나 할까요? 공부 잘하는 사람은 머리가 좋고, 공부 못하는 사람은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나요? 아마,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 잘하고 못하는 것과 머리가 좋고 나쁜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부 잘하는 이유는 뭘까요.


시험은 생활양식을 측정하는 것

어떤 사람들은 우리 나라의 교육 제도가 정말 쓸데없는 것들만 무지막지하게 많이 가르치려고 학생들을 못살게 굴었다고 합니다. 그 근거를 들어보면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험 제도란 아이큐를 측정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시험 제도는 외우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양을 측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의 진정한 목적은 바로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들의 생활 양식, 즉 그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생활 양식)을 측정하는 것입니다.


산업화와 교육

우리 나라의 근대화 즉, 산업화를 통한 본격적인 서구화가 1962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경공업 위주의 공업 정책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중화학 공업의 중점 육성으로 목표가 바뀝니다. 그 때 우리 나라 교육 제도의 중심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공업 한국, 기술 입국, 기능 올림픽, 공업고등학교, 공업 전문대학……, 이런 얘기 많이 들어보셨지요?

자, 여기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갑니다. 여기서는 나사를 조립하고, 다음엔 용접을 합니다. 마치 채플린이 주연한 영화 ꡔ모던 타임즈ꡕ처럼 사람들은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기계 부속처럼 일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일하는 어떤 노동자가 창의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은 기계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더 예쁘면 안될까? 색상은 뭐 이래? 나도 기계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하고 허구한 날 이런 생각만 한다면 항상 조립할 시간을 놓치게 될 것이고, 그것은 그대로 제품 불량률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창의성이 필요없던 시대

이런 상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성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키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기계처럼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실성, 책임감, 명령에 복종하는 규율, 이런 것들이 필요한 것이죠. 이러한 현상을 저 유명한 경제학자인 엘빈 토플러는 ꡔ제 3의 물결ꡕ에서 공장 굴뚝 시대에 산업 인력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자질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에 필요한 양질의 인력을 공급해야 하는 교육도 당연히 학생들에게 그런 자질을 학습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겠지요? 학력고사 시절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많은 영어 단어, 그 어려운 수학 공식, 일상 생활에서 쓰일지도 안 쓰일지도 모르는 그 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남김없이 머리에 기억시키려면 여간한 노력파가 아니고서는, 군말 없이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성격이 아니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겠지요? 지금 여러분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경제 개발 과정에서는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창의성보다는 시키는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제까지의 교육 과정은 바로 그러한 생활 양식을 길러 주고 측정하는 교육이었습니다.


현대는 창의성 시대

자,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어떻게 변했기에 입시 제도가 달라졌는지 알아봅시다. 전세계 모든 산업들, 특히 고부가가치를 자랑하는 산업은 이미 공장 굴뚝 시대의 산업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우리 나라가 자동차 150만대를 수출해야 벌 수 있는 돈을 미국은 ‘쥬라기 공원’이라는 단 한 편의 영화로 벌어들였다는 기사가 신문과 방송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정보화 시대, 문화 산업 시대의 위력을 핵심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나라의 모든 기업가들과 정부의 정책 결정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대통령은 세계화를 부르짖었고, 기업들은 성실성을 근무 평점에서 가장 높이 사는 경향에서 창의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으로 급격하게 선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거 중화학 공업이 우리 나라 산업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때, 기업주가 가장 선호했던 사람들은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는 밤이 늦도록 퇴근하지 않고, 책상과 기계에 붙어 앉아 연구와 생산에 몰두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창의성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도 없는 사람이 밤늦도록 불을 켜 놓고 일하는 것은 성실성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무능력하다고 비판받게 되었습니다.


독창성과 상상력을 키우는 논술

이러한 국가․ 경제․ 사회 배경 하에 새로운 방식의 교육 제도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름하여 ‘21세기를 위한 교육 대개혁’이라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 교육 제도는 학생들의 규율을 훈련하고 성실성을 가르치는 교육 제도가 아니라, 창의성과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교육 제도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도입된 하나의 과목이 바로 논술 고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논술 고사가 어떤 능력을 학생들로부터 테스트하고자 하는 것인지 이제 분명해 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독창성과 상상력입니다.  그럼 논술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대충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 주류 담론인 창의성

이젠 모두가 창의성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고 무기는 바로 창의성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이 질문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누구를 위한 창의성 기르기냐 하는 문제입니다.

국가가 요구하는 인재는 곧 바로 우리 사회를 주도해 가는 자본가 혹은 기업가들의 요구사항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기업과 경쟁하여 이길려면 한 두가 지 능력으로 무장된 인재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재다능한 인간, 전인적인 인간, 그러면서도 독창성과 순발력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인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근대 산업사회에서 필요했던 생활양식이나 기술은 이미 낡은 것이 되었고 그래서 흔히 말하는 낡은 세대 즉 4-50대 산업역군들은 곳곳에서 퇴출이나 몇퇴를 당하고 있습니다. 끽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제대로 저항의 몸짓을 해 보지도 못한 채 무능력자로 찍혀 쫓겨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겐 무한한 상상력과 창의성이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본의 논리이자 시대의 흐름입니다. 따라서 초등학교부터 열린교육을 시작하고 있으며 중고등학교에서도 독서를 비롯 창의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또다른 이데올로기인 창의성이란 교육 노역에 참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의성으로 똘똘 뭉쳐진 노예들은 누구를 위해 충성하는 것일까요? 자기 삶을 위해? 아니면 그 무엇을 위해?  한 걸음 물러나서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내 삶을 찾아 떠나는 논술공부

논술은 이 시대 주류 유행인 창의성만을 쫓아가는 학습이어선 안 됩니다. 창의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은 절대적인 교육 목적이라 인정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세우는 교육으로 변환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또 다시 이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몇몇 독점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노예로 전락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이치가 아닙니까?

탐욕과 갈등과 경쟁과 대립과 억압과 폭력으로 점철된 이 징글징글한 현대문명의 야만성은 우리들의 심성을 파괴하고 눈 멀게 하여, 친구도 없고 이웃도 없으며 결국엔 가족마져도 싸늘하게 거부하는 입으로만 요란한 공동체 사회가 되었습니다.

나눔이 없는 사회, 평화가 없는 사회, 그리하여 이겨야 할 경쟁상대만 있고, 쳐부수어야 할 적만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서의 삶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모두들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야기 하지만 돌아서면 싸늘한 비수를 들이대는 그런 정글에서 우리 교육이 지향해 가는 것은 어떻해야 할까요?

우리 교사들은 논술 교육을 통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올바로 보게 하고, 그것을 헤쳐 나가는 진정한 지혜는 어디에서 올 것인가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지구적인 생존 위기 앞에서 기업이 요구하는 창의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논술 교육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대한 모든 모습과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를 알고 자기를 사랑하며 그 바탕위에서 가족과 이웃, 더 나아가 사회를 구원하는 진정한 방법을 자기 스스로 가지도록 하는 논술교육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논술은 오히려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것

지난 20세기는 이성과 합리를 바탕으로한 서구 문명과 서구 과학이 지배하였습니다. 이성론과 합리론은 인간 존재를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로운 것으로 위치하게 하였습니다. 서구 과학은 모든 사물을 인간에게 충성하고 유용하게 쓰이는 것으로 가치를 인정받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인본주의는 동양의 자연주의를 철저하게 무가치한 것으로 짓밟았고 그로 인하여 현대사회는 전면적인 생태위기와 지구환경 위기를 몰고 왔습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온갖 기상이변과 원인조차 규명할 수 없는 각종 바이러스, 삽시간에 수천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감기등 각종 질병의 창궐, 시시각각 다가오는 식량과 에너지 위기, 물전쟁과 핵전쟁 위험 앞에 우리 인류는 디스토피아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지구 경제를 파행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초국적 독점 자본과 권력, EU를 비롯한 경제 블록 형성으로 인한 무한경쟁의 파고는 높아만 갑니다. 지구인 삼분의 일이 절대기아로 신음하고 있는 와중에도 인종청소와 종교 갈등으로 매일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인류가 발명한 최고 문명의 이기라고 하는 자동차는 하루에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사상자를 내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귀함보다 자본 축적이 더 귀중한 가치이며, 자연을 살리고 보존하는 것보다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이 더 급선무가 되어 버린 현실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이성적 사고로 정신을 차립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해, 그래야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어, 더 공부해야 하고 더 부지런해야 해 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하는, 무너진 자연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시기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불가능할 지 모르지만, 이제는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논술 교육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고 아이들에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깨우치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논술 교육이 가야 할 방향일 것입니다.

 

 

책읽기와 논술 어떻게 할까?

 

독서와 논술

논술은 주어진 논제를 풀어 가는 논리적이고 독창적인 생각하기를 바탕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온갖 지식과 생각을 모두 끄집어내어 자신의 뜻이 잘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논설문과 논술문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논설문은 어떤 대상에 대해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데 초점을 맞춘 글이라면, 논술은 이미 주어진 과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모든 과정을 말합니다. 따라서 논술은 현대 사회와 미래 사회 그리고 역사, 철학, 종교, 문학, 과학, 환경, 교육, 노동, 노인, 청소년, 여성 등 수 많은 영역과 과제를 자기 스스로 분석하고 정리하며 해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에 영국과 미국에서 양이나 원숭이 등 동물을 복제하는 데 성공했다는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들려 오고 있습니다. 동물 복제가 성공한 이후 인간을 복제 할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들려 옵니다. 이미 우리 나라에서도 우량 송아지를 대량으로 복제하여 키우고 있고, 경희대 의대에서는 수정란을 배양하는 기술을 넘어서 이젠 복제하는 데 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만약 동물 복제나 인간 복제에 대한 견해를 묻는 논술 문제가 나왔을 경우 우리는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논술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

마니라는 학생은 동물 복제나 인간 복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았고,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유전공학 관련 서적과 미래 사회를 예측한 공상과학 소설인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쓴『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라는 책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강타라는 학생은 주워들은 몇 가지 상식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학생이 훌륭한 논술문을 쓸 수 있을까요? 당연히 인간 복제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과 자신의 생각을 해 본 마니 학생이 더 우수한 글을 쓸 수 있겠지요.


논술의 바탕은 독서

이처럼 논술을 공부하기 위해선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된 책을 열심히 읽는 것도 꼭 필요합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학생은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가진 학생입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생각하기를 전개할 수 있고, 생각하기를 통해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앞으로 싣게 되는 초, 중 독서․논술은 초등 학생과 중학생이 어떤 책을 읽어야 하며 독서를 바탕으로 생각 넓히기와 논술하기를 어떻게 해 볼까를 맛나게 펼쳐 보이겠습니다.


논술 세상에 들어가기

논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자 그럼, 이런 생각부터 해 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사랑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친구나 가족이라고 해요. 그리고 학교나 학원, 집, 옷, 먹을 것, 돈, 은행, 슈퍼마켓, 식당, 도서관, 극장, 텔레비전, 오디오, 냉장고, 자동차, 기차, 전화, 컴퓨터, 인터넷, ……등등.  어휴! 생각해 보니 있어야 할 것이 너무 많군요. 그 중에 우리가 생활하는데 꼭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혹시 돈이 아닐까요? 어딜 가려면 돈이 있어야죠? 무얼 먹으려면 또 돈이 있어야 하구요. 책이나 연필을 사려고 해도 돈이 필요하죠? 화이트데이에 여자 친구에게 초콜릿을 사 주려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해요. 그럼 돈이 가장 필요한 존재이겠네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먼저 돈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씀씀이에 따른 돈의 가치

전자 오락에 정신이 팔려 점심 먹는 것을 깜박 까먹은 강타와 마니라는 학생이 있습니다. 둘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얼마의 돈이 필요할까요? 글쎄요? 얼마나 배가 고픈지 먼저 알아야겠지요.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보통 한끼에 얼마만큼의 식사를 하는지도 알아야 하겠구요. 또 어떤 음식을 주로 좋아하는지도 알아야겠지요. 집에서 밥을 먹지 않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고 생각해 보아요. 식당도 종류가 무척 많지요. 분식집, 중국집, 피자집, 햄버거집, 치킨집, 한식당, 고급 레스토랑, 일식집, 호텔 뷔페 등 어디에서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음식값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강타와 그 친구인 마니는 다음과 같이 점심을 먹었대요. 다음 표를 보면서 이야기를 정리해 볼까요?

밥 한 끼 먹는데 들어가는 비용(돈)

사람

강타

마니

나는?

사 먹은 곳

피자집

학교 앞 슈퍼마켓

 

사 먹은 것 / 가격

피자 한 판

7,000원

빵 한 개

500원

 

 

콜라 1컵

3,000원

우유 한병

500원

 

 

과일,야채1접시

1,000원

 

 

 

 

들어간 돈 합계

 

11,000원

 

1,000원

 

 

표에 나타난 것처럼 밥 한 끼 먹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11배나 차이가 났습니다. 이렇게 보니 사람에 따라 돈 씀씀이와 가치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이렇게도 차이가 난다는 것이지요. 재미있는 분석을 해 볼까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을 한 번 따져 봅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모두 몇 가지 인가요?

모두 몇 가지 인가요?

조사를 해 보니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무척 많지요? 그런데 왜 살 수 없을 까요? 이 세상엔 돈이면 모두 된다고 하는데.  요즘 돈 때문에 나라가 온통 시끌법적하죠?  왜 모두들 돈을 벌기 위해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잠도 충분히 못 자고 놀러도 못 가고…, 돈이 원수 같다고 하는 사람도 많아요?


돈은 좋은 놈? 아니면 나쁜 놈?

이런 것도 생각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돈이 있으면 편리한 것과 좋은 점, 돈이 없으면 불편한 점과 나쁜 점에 대해서도 분석해 볼까요?

돈이 있으면 편리하거나 좋은 점

돈이 없으면 불편하거나 나쁜 점

 

 

모두 몇 가지 인가요?

모두 몇 가지 인가요?

돈이 없으면 불편한 점이 더 많다고요? 정말 그럴까요? 옛 선비들은 가난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지만 현대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불편한 점이나 곤란한 점이 무척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돈이 많아야 한다는 것도 문제가 있지요.


독서와 논술은 형님과 아우

돈 이야기를 하다 보니 끝이 없지요? 이게 바로 논술입니다. 어떤 대상을 여러 방면에서 생각하고, 쪼개어 보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보기도 하는 것이 바로 논술 첫걸음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가져야 우리는 돈이란 놈이 도대체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놈인지에 대해 바탕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넓고 다양하게 생각하기 위해서 우선 부지런히 책읽기를 해야 합니다. 폭넓게 많은 양의 독서를 한 친구는 논술을 훨씬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생각하기


낱말 읽기와 책읽기

요즘 학생들은 책을 많이 읽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많구요. 너무 바쁘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덮는 순간 그 내용에 대해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책 내용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을 때, 그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분명히 책을 읽었는데도 내용을 모르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책을 읽지 않고 단어를 읽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혹은 단어를 읽되 문자 기호를 읽지 않았을까요?  또는 문자 기호를 읽되 딴 생각을 하면서 읽지는 않았을까요?  아니면 단어의 뜻을 모르는 채 그냥 읽어 내려 가는 데만 급급하지 않았을까요? 책을 읽으면서도 끊임없이 수학 숙제나 영어 숙제 등 다른 걱정을 하는 학생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학생은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그냥 문자 기호를 읽었을 뿐입니다.

문자 기호만 읽은 학생이 그 내용을 기억해 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글은 낱말로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장으로 읽어야 하며, 또한 문장을 연결하여 단락으로 읽어야 합니다. 또 각 단락의 내용을 묶어 한 편의 글로 읽어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은 낱말을 읽으면 글을 읽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요. 그래서 글 전체 내용이 머리 속에 잘 정리되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책읽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상하며 책읽기

책을 읽을 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어봅시다.

첫째, 나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기

둘째, 이 책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를 예측하며 읽어보기

셋째, 글쓴이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썼을까 상상하며 읽기

넷째, 책을 읽다가 모르는 낱말이 나오면 단어장에 기록하고  뜻을 사전에서 찾아 꼭 알고 넘어가기


종합적으로 생각하기

책읽기를 잘 하기 위해서, 아니면 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은 재미있는 낱말 게임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게임은 우리 주변에 있는 이야깃거리를 활용하여 생각을 넓고 다양하게 키우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관계적 사고, 방사형 사고, 종합적 사고라고 합니다. 관계적․방사형 사고란 어떤 낱말이 가지고 있는 뜻을 그대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어생각하기를 통해 관련되는 것끼리 하나의 그물망으로 연결시켜 보는 생각하기입니다. 예를 들어 ‘신세대’하면 ‘자유로움’, ‘발랄함’, ‘랩’, ‘솔직하다’, ‘기성세대’, ‘구세대’, ‘힙합 바지’, ‘패션’, ‘버릇이 없다’, ‘물들인 머리’, ‘귀걸이’, ‘코걸이’ 등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낱말이나 사물을 통해 온갖 생각을 뻗어가게 하는 것을 관계적 사고라고 합니다.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을 찾아내어 하나의 그물안에 연결시켜 보는 것은 종합적 사고를 하는데 바탕이 됩니다. 그럼 종합적 사고는 어떻게 할까요? 말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생각해 보는 방식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사물이나 현상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비판적인 눈이 필요하고 어떤 문제 안에 담겨 있는 바탕을 해석하여 새로운 해결방법을 찾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자유롭게 연상하기, 끝없이 생각을 이어가기는 사고력을 높여주고 문제 해결 능력을 키워줍니다.

종합적인 사고를 하는 학생들은 책에 담긴 내용 덩어리를 쉽게 이해하고, 글쓴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잘 정리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계단’이란 낱말을 가지고 종합적 사고를 해 보도록 할까요.


계단은 단계이다?

오늘 생각해 볼 낱말은 ‘계단(階段)’ 입니다. 우리는 매일 몇 번인지도 모르게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가게 됩니다.  끝이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기도 하고 아무리 가도 끝이 나타나지 않는 계단을 올라가거나 내려가기도 합니다. 지하철을 타면 아득한 아래까지 수 없이 많은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매일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계단’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을까요? 계단을 맨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 어떤 생각 때문에 만들게 되었을까?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계단을 인생에 빗대기도 합니다. 인생이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끝없이 계단을 올라가는 일이기도 하고 어떨 땐 내려가야 하는 좌절을 맛보기도 합니다.

계단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층층대’, ‘일을 하는 데 밟아야 할 순서’라고 뜻이 나와 있습니다. 계단을 바꿔 말하면 ‘단계(段階)’가 됩니다. 계단과 단계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꼼꼼하게 생각해 보면 비슷한 뜻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단 하면 무엇이 생각날까요? 책을 읽을 때 순서를 정해서 읽듯이 생각할 때도 어떤 순서를 정해서 하면 어떨까요? 다음 순서에 의해 생각을 펼쳐  볼까요?

① 계단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② 계단이 있는 곳

③ 계단 모양에 따른 종류

④ 계단을 생각하면 힘들었거나 무서웠던 기억

⑤ 계단을 생각하면 즐거웠거나 좋았던 기억

⑥ 계단을 생각하면 연상되는 온갖 생각들


낱말과 연상하기

다음은 5학년 어린이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생각해 본 낱말을 모두 적어 보았습니다. 아래 글을 읽기 전에 먼저 자신이 위의 순서대로 생각나는 것 모두를 써 보세요.

① 힘들이지 않고 올라간다. 안전하게 내려간다. 통로, 길, 

② 학교, 아파트, 높은 건물, 지하 주차장, 지하철, 탄광, 비행기, 배, 높은 산, 운동 경기장, 체육관 관람석, 울산 바위 등산로, 바벨탑, 피사탑, 잉카 제국, 피라미드, 2층 침대, 미끄럼틀,

③ 사다리,  높은 빌딩의 엘리베이터,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소방차에 달려 있는 고공 사다리, 이삿짐 올리고 내릴 때 사용하는 곤돌라, 높은 산에 올라갈 때 타 본 케이블카, 스키장에 올라갈 때 타는 리프트,

④ 정전, 힘들다, 고통, 인생, 깡패,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 무섭다, 63빌딩, 좁다, 컴컴하다, 더럽다, 비상구, 지하 감옥, 영화 - 벤허, 빠삐용, 더록,

⑤ 공상하기 - 높은 계단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며 생각하는 것, 성취감 - 높은 곳까지 힘들게 올라가 내려다 볼 때, 우등상 - 어려운 수학이나 영어를 하나씩 차근차근 공부해서 성적이 잘 나왔을 때, 승리 - 상 탈 때 계단을 올라감, 감따기 - 높은 감나무에 사다리 타고 올라가 감따는 즐거움

⑥ 공부 - 계단 학습 - 성적, 계단식 논밭 - 화전민 - 노동 - 땀 - 생존, 인생 - 아기 - 어린이- 청소년 - 청년 - 어른 - 노인 - 죽음, 청소 아줌마, 발소리, 숨소리, 가위바위보 놀이, 지그재그, 도미노, 디딤돌, 블록 쌓기, 저축, 먹이사슬, 부자와 가난한 사람, 귀족과 평민과 노예, 회장-사장-부장-과장-계장-주임-사원, 결승점, 노력, 무인 카메라, 부실 공사, 목표 달성, 성공,


계단과 관련된 것을 찾아보았는데 끝이 없이 많은 낱말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위에 나온 낱말과 자신이 생각해낸 낱말을 견주어 보세요. 그리고 이런 낱말들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무엇을 생각했길래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해 보아요.

만약 자신이 이 정도의 낱말을 떠 올렸다면 그 학생은 정말 생각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는 이런 방법으로 해보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생각하는 힘을 키워 주기도 합니다. 다음 문제를 풀면서 생각하기를 완성해 보세요.

《오늘 풀어 볼 문제》

‘계단’, ‘나’, ‘길’, 등 세 낱말을 활용하여 한 편의 글을 완성하세요. 어떤 소재나 내용을 가지고 써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세 낱말의 뜻을 잘 드러내도록 하되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쓰세요.

(글 길이는 띄어쓰기 포함 1200자 내외입니다)

 

 

 

아이들 기질을 어떻게 볼까?

강의 / 마니선생

 

1. 인지학적 인간론


여러 학문에 분할되어 있던 인간에 대한 지식을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하나의 학문 형태, 즉 ꡐ인간학ꡑ의 형태로 통합하려고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카스만이다. 다음으로는 짐머만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1882년 빈에서 『인지학 개요』를 출판했다. 이 책은 짐머만의 대표적인 저서일 뿐만 아니라 그의 강의를 자주 청강했던 슈타이너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표 1〉인지학적 인간학의 개관

세계 삼체성

우주

사회

기능

덕목

인간

영적 기능

신체적 기초

형태

(공간)

물질

세계

경제

형제애

육체

욕구

신진대사/ 지체구성

(시간)

영혼

세계

정치

권리

(국가)

평등

영혼

느낌

리듬체계

(호흡,혈액 순환)

의식

(영원성)

정신

세계

문화

(정신생활)

자유

정신

사고

뇌, 신경조직

 

신체적 확력과 삶의기쁨

 

인간 본질 구성체

기질론

병적으로

발전된 기질

탄생

주기

발달

심리학적 특징

교육

원리

물리적 신체

우울

질인

치우

첫 번째

7년기

아이의 몸 전체는 외부 세계에 열려 있는 ꡐ감각 기관ꡑ이다.

모방과 본보기

에테르체

점액

질인

정신박약

두 번째

7년기

기억력,양심, 자유로운 상상력이 깨어난다.

추종과 권위

아스트랄체

다혈

질인

정신착란

세 번째

7년기

추상적 사고, 자유로운 판단력, 충동, 정열

독립된 사고와 판단력의 요구

자아체

담즙

질인

조증

네 번째

7년기

성숙과 자유

자기 교육을 통한 교육

 

슈타이너가 저서에서 분명히 밝힌 것처럼 인지학과 인간학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자연 과학적 연구 방법이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인간이 사회 환경은 물론 자연 환경에 구속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처럼, 감각과 지각을 통해 인지할 수 없는 사실들, 결국에는 인간과 우주를 구성하는 힘들을 이루는 계량화할 수 없는 현상들에 대한 연구도 중요하게 보았다.

인지학적 인간학은 형태․삶․의식이라는 삼체성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들은 육체․영혼․정신이라는 인간의 삼지적 구조를 통해 경험 될 수 있고, 공간․시간․영원성이라는 ꡐ세계 삼체성ꡑ속에 이들이 상응됨을 찾는다.

영혼적인 삶은 사고, 느낌, 욕구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서로 상호 작용한다. 예를 들면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연결이 가능하고 육체와 영혼과 정신이 통합되어 하나의 전체로 작용할 때, 비로소 참다운 의미의 인간 존재가 가능하다.

슈타이너는 자연적 유기체처럼 사회적 유기체도 마디로 나누었다. 그는 자연적 유기체가 사고를 폐가 아닌 두뇌를 통해 하는 것처럼 사회 유기체 역시 경제․정치(권리)․문화(정신) 생활의 영역으로 나누었다. 이들은 서로 공존하며 상호 독립적으로 사회 기능을 하고 있다. 이들이 갖고 있는 고유한 합법칙성에 따라 가능하며 각각의 특수한 생활 조건들이 효력을 얻게 된다면 사회 생활의 세 분야들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정신 생활은 자유 속에서만 성공할 수 있고, 정치(권리) 생활에서는 평등이 지배해야 하며, 경제 생활은 형제애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인간은 모두 세 가지의 사회 체계 속에서 살고 있다. 정신 생활 영역에서는 인간의 품위에 대한 느낌이 생겨나고 정치 생활의 순환이 균형을 잃지 않으려면 모든 관계자들은 사회적인 상호간의 조정을 필요로 한다.

각각은 다른 것의 임무를 떠맡을 수 없고, 자신의 독립성의 가치하에서 다른 것과 협력해야 한다. 정치 체계가 경제를 떠맡으려 한다면 경제는 파괴되고 경제 체제가 정치적으로 되면 그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슈타이너는 철학 분야에서 윤리적인 것을 논할 수 없는 초감각적 영역을 신비주의자에게 넘겨준 것을 자신의 ꡐ영적 관찰ꡑ을 통하여 학문적으로 재구성하였다. 그리하여 슈타이너의 인식의 개념은 인간의 본질과 외부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인간 관찰의 결과로서 직접 생기는 것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그는 돌, 별, 나무, 동물 등과 같은 사물들 안에도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과 더불어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차원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인지학적 훈련 방법의 중요한 관심사들 중의 하나는 본질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인지학은 신지학과는 반대로 인간을 우주 세계와 현 세계의 중심으로 이해한다. 인지학의 중심 관심사는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세계를 넘어서 파악하는 인식의 도구들을 개발하는 데 있다. 이런 초감각적인 인식의 도구들은 각 인간이 의식적으로 ꡐ지고의 세계ꡑ에 관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본다. 다른 말로 하면 인지학은 인간의 지각 가능성의 폭을 확장하려는 것이다. 신이 아닌 인간을 인식의 중심에 놓고 인간 속에 깃들어 있는 불가사의한 인식 능력을 파악한다. 이러한 능력이 각성되고 단련되면 일종의 투시력처럼 되는 정신 세계의 직관적인 관조가 가능하다.


2. 인지학적 발달론

 

인간의 가치와 자유는 인간 안에 있는 다양한 소질과 능력을 개별적으로 발달시키는 만큼 생겨나므로 모든 교육과 수업은 인간 발달 단계의 조건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이번의 발달 심리학에서는 변화하는 영적 외향들의 시간적인 결과들만을 기술하면서 내적인 발달과 변화는 파악하지 못했었다.

슈타이너는 자신의 인지학적 방법으로 육체처럼 영혼과 정신의 파악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인간의 발달을 연속적인 과정으로 보지 않고 단계적인 과정으로 보았다. 그는 인간 발달의 비약적이고 질적인 변화의 특징을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하여 인간의 단계적 발달 현상을 ꡐ성숙ꡑ이라든가 ꡐ발전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ꡐ탄생ꡑ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ꡐ탄생ꡑ이라는 의미를 되새겨 보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직 덜 성숙했는데 조산을 하게 된다면 많은 발달 장애를 가져 올 것이다.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벗어나 미숙아를 낳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서두르는 교육은 잘못된 교육이다.

이러한 발달 단계는 시기적으로 개인차는 있으나 심신의 성장에 있어 이 단계는 반드시 거치게 된다. 세 가지 단계 즉, 의지, 감정, 사고 발달 단계를 거쳐 이것들을 지닌 ꡐ자유로운 인간ꡑ이 양성된다.


가, 네 가지 인간 본질 구성체

인간이 태어날 때 눈에 보이는 육체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 구성체도 같이 탄생한다.

① 물리적 신체 : 무기질과 자연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정신을 뺀 나머지 육체를 말하며 죽은 후에나 분해되지 살아서는 분해되지 않는다. 물질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과학에 종속되어 있다.

② 애테르체-생명체 : 살아 있는 신체는 성장한다. 지각되지 않는 힘이 현세에 작용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식물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어떤 것이다.

③ 아스트랄체-영혼 육체 또는 감정체:인간에게는 감각의 수레, 곧 고통, 즐거움, 충동, 열정, 싫어함 등이 있다.

④ 자아체-인간 :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요소인 제 4의 요소, 즉 ꡐ나ꡑ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는 힘을 ꡐ자아ꡑ라는 말로 표현한다. 인간은 자아가 있으므로 자연의 모든 것을 향상시킬 수 있다. 자아는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의 충동을 지시하고 통제한다.

〈표2〉4가지 인간 본질 구성체

탄생

가시여부

보호막

시기 (특징)

발 달

물리적 신체

O

모태

출생시

 

생명체

X

물리적 신체

7세경 (젖니갈이)

의지

감정체

X

생명체

14세경 (사춘기)

감정

자아체

X

감정체

21세 무렵

사고

생명이 태어난 후 인간의 구성체는 각각 다른 방법으로 다른 시기에 발달해 간다. 이러한 인간 구성 요소의 여러 발달 방법을 고려할 때, 그때서야 우리는 인간의 성장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이 4개의 구성체는 저마다 막에 싸여 있어서 산월이 오기까지는 그 속에서 보호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신체에 있어서의 막은 모체이고 우리가 알기 쉽다. 그러나 생명체, 감정체, 자아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알기 어렵다. 신체의 출생은 10개월 태내 기간 이후에, 생명체는 대략 7세경, 감정체는 14세, 자아는 21세에 탄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각각의 구성체는 충분한 보호 기간을 가지고 성숙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육에서 이러한 발달의 진실이 고려되어야 한다.


나. 발달 단계론

슈타이너의 발달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7년의 리듬 속에서 이루어지며 유아에서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분명히 구별 가능한 특수한 학습과 소질의 성향들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7년기는 출생에서 7세까지이며, 두 번째 7년기가 7~14세, 세 번째 7년기가 14~21세로서 개인차는 있으나 인간의 성장은 반드시 이 3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에 따라 발도르프 학교는 3~6세를 위한 유치원 교육, 7~14세를 위한 1~8학년 교육, 14세 이후를 위한 9~12학년 교육으로 분류된다.


(1) 첫 번째 7년기(출생~7세) : 물리적 신체의 탄생

이 시기에 속한 아이의  몸 전체는 하나의 감각 기관이다. 감각이 외부 세계를 향해 열려 있으므로 교육은 말이나 개념이 아닌 오감의 반응, 온몸에 의한 모방에 의하여 행해진다. 이때 생명체는 보호막 속에 있어야 신체적 발육을 관장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 그리고 드디어 생명체는 어린이의 이를 만든다. 이렇게 되면 생명체의 막 속에서의 일이 완료되고 바깥 세상에 나가기 좋은 산월이 된다.

밖에 나온 생명체는 기억력을 관장한다. 4세 정도의 어린이가 다소 기억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편적인 것이고 기억의 태동일 뿐이므로 이것을 강제로 조산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예를 들어 4세 정도의 유아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는 기억과 관련된 상상력인 경우가 많다. 7세까지는 생명체를 막 안에 있게 하여 신체와 오감 발육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나중에 어른이 된 후의 행동력, 의지력의 근원이 된다.


(2) 두 번째 7년기(7~14세): 에테르체(Aetherleib)-생명체(Lebensleib)의 탄생

  이를 갈기 시작하면 생명체가 외계에 나온 것을 뜻하며 생명체는 기억, 습관, 기질, 성향을 관장한다. 이때부터 어린이는 학습을 시작해도 좋다. 특히 이 시기는 예술에 대한 감각이 눈을 뜨게 되는 때이다. 특히 예술 중에서도 생명체의 진동과 같은 음악에 대한 감각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감정체는 아직 막 속에 있다. 감정체는 사고력을 관장하는데, 초등 학교 고학년이 되면 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역시 조산시키면 안 되므로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 7년기 동안, 학교 공부의 본질은 모두가 감정을 통한 것이어야 한다.


(3) 세 번째 7년기(14~21세): 아스트랄체(Astralleib) -영혼 육체(Seelenleib) / 감정체의 탄생

사춘기가 되면 감정체가 산월을 맞이한다. 청소년은 개인의 관심과 취미를 발달시키는 능력과 인식 문제에서 독립적인 판단을 얻으려 노력하며 영혼의 기초가 눈뜬다. 또한 세계와 인간에 대한 더 깊은 인식 욕구가 나타나고 추상적 사고 능력이 생기며 자신의 영혼의 힘, 즉 감정과 의지로 환경과 더 자유롭게, 더 독립적으로 맞선다. 따라서 학교 수업은 심층적인 학문적 생활 태도의 시초를 닦는데 기여한다. 상상력과 권위에 기초하여 받아들여진 그 이전의 지식을 자신의 논리로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3. 기질론


교육은 인간에 대한 앎에 기초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개개인의 어린이가 타고난 천성을 알 필요가 있다.  기질론은 이러한 측면에서 보여 주고 있다. 이 기질론은 고대 이래 동서양에서 행하여진 인간 기질의 분류법인데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도 호응을 받고 있는 사상 의학(四象醫學)과 유사하다.

슈타이너의 기질론은 그의 인간론의 기초 위에서 해석된 것으로서 어린이 교육에 있어 중요한 근거로 제시된다. 그는 인간의 기질을 4가지로 분류하고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각 기질에 따른 교육적 처방이 달라야 한다고 했다. 각 기질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행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기질론

기질구분

특  징

단  점

연령적

체형

다혈질

기분이 가볍고 잘 변함. 천진난만함과 낙천성으로 주위를 즐겁게 해주고 자유로움. 호기심이 왕성.

침착성이 결여. 지속력이 없다. 완성이 드물다.

 

담즙질

기분이 강하고 뜨겁고 격하며 행동적으로 실제적임. 확고한 목표를 향한 의지가 있다. 지구력과 지도력이 있으며 남에 대한 불평이 없다.

타인에 대한 인정이 결여. 자신의 정의감을 남에게 강요. 횡포, 복수, 공격성이 있음

땅딸막함

우울질

기분이 자기 내면에 있고 감상적, 자아 중심적이며 조그마한 일에도 마음을 씀. 의지가 강하고 진실에 따르려는 철저성이 있다.

사소한 일에 신경을 써 여유가 없고, 주위까지 기분을 어둡게 함.

길고 여윔

점액질

기분의 움직임이 적고 침착, 평안. 외부와 조화적이긴 하나 무관심하여 자기 속의 관심에만 잠김. 화를 내지 않고 평화를 사랑, 오히려 유머를 할 여유가 없다.

까다롭고 힘든 일을 싫어하여 게으름뱅이가 되기 쉽다. 냉소적이거나 방관적으로 될 수 있다.

둥글둥글하고

뚱뚱함


① 다혈질인(Sanguiniker): 성격이 급하고 충동적이며 감동적이다. 기분이 가볍고 잘 변하며, 천진난만함과 낙천성으로 주위를 즐겁게 해주고 자유롭고 호기심이 왕성하다. 단점으로는 침착성이 결여되어 있고 지속력이 없다. 공기(風)의 속성에 비유되며, 사상의학에서 태양인의 특징(肺大肝小:폐대간소)와 유사하다. 이런 아이에 대한 처방은 그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것이다. 그에게 올바른 이야기와 운동량이 주어져야 한다.


② 담즙질인(Sholeriker): 매우 능동적인 리듬 체계를 가지고 있다. 기분이 강하고 뜨겁고 격하며 행동이 실질적이다. 업무 추진력이 강해 가정적이기보다는 사회적이다. 확고한 목표를 향한 의지가 있다. 지구력과 지도력이 있으며 남에 대한 불평이 없다.

단점으로는 타인에 대한 인정이 결여되어 있고 자신의 정의감을 남에게 강요하며 횡포, 복수심, 공격성이 있다. 불(火)의 속성에 비유되며, 사상 의학에서 소양인의 특징(脾大肝小:비대간소)과 유사하다. 이런 아이에 대한 처방은 흥미롭게 할 수 있는 많은 인상깊은 것들을 주어야 한다. 풍부함은 그의 기질을 소모시키면서도 그를 유지시킬 것이다.

③ 우울질인(Melancholiker): 기분이 자기 내면에 있고 감상적이다. 자아 중심적이며 조그마한 일에도 마음을 쓴다. 충성심이 있고 성실하며 너그러운 마음씨와 풍부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단점으로는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써 여유가 없고 주위까지 기분을 어둡게 한다. 물(水)의 속성에 비유되며, 사상 의학의 태음인의 특징 (脾大腎小:비대신소)와 유사하다.

이런 아이에게 흥이 나도록 만들려고 우스운 이야기를 하거나 그를 추켜세우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며 사실 해로운 일이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그 아이를 더 스스로 경멸하여 움츠리게 하고 완전히 무관심한 상태로 만들기 쉽다. 이런 아이에게는 다른 사람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알게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④ 점액질인(Phlegmaker): 내성적이며 여성적인 데다 치밀한 성격으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다. 기분의 움직임이 적고, 침착․평안하다. 외부와 조화적이긴 하나 무관심하여 자기 속의 관심에만 잠긴다. 화를 내지 않고, 평화롭다. 단점으로는 유머를 할 여유가 없다. 까다롭고 힘든 일을 싫어하여 게으름뱅이가 되기 쉽다. 냉소적이거나 방관적으로 될 수 있다. 흙(土)의 속성에 비유되며, 사상 의학의 소음인의 특징(腎大脾小:신대비소)과 유사하다.

이렇게 주위에 무관심하고 무딘 아이에게는 다른 사람이 관심을 보일 때 오는 이익을 제시해 준다. 역으로 교사가 점액질 유형의 행위를 보이면 이것이 어린이를 지루하게 만들어 깨어나게 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다양한 기질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 가지의 특정한 기질만으로 단정지어서 말하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네 가지 기질을 균등하게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개개인은 어느 한 기질이 우세하기도 하고 열등하기도 하다. 슈타이너의 교육에서 교사는 어린이 개개인의 기질을 잘 파악하고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수업을 운영할 때 다른 기질의 아이들을 무작위로 섞어 놓는 것보다 같은 기질의 아이끼리 집단 구성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슈타이너는 말하고 있다. 서로 기질이 상쇄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같은 기질의 아이들이 함께 같은 집단에 있다보면 다혈질 집단의 아이들은 ‘여기는 너무 떠들어서 싫다’고 한다.

점액질 집단에서는 ‘여기서는 재미가 없다.’고 불평을 한다. 이러한 때에 가고 싶은 집단으로 가도록 안내하며 그 집단에서 역할을 해 보도록 격려한다. 이렇게 하여 균형을 유지하게 할 수 있다.

기질에 따라서 활동을 배려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식물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꽃이 피는 것에 대하여는 다혈질 아이에게, 낙엽이 지는 것에 대하여는 우울질 아이에게, 뿌리가 내리는 것에 대하여는 담즙질 아이에게 지시한다. 점액질 아이는 전체를 감상하도록 하게 한다.


기질 유형의 다양성 / 팀 라헤이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은 20가지의 장점과 20가지의 약점을 정도에 따라 가지고 있다(10가지는 주요 기질이고 10가지는 종속적인 기질이다), 장점과  약점들 중 몇 가지는 우리가 알다시피 서로의 특성을 약화시키며, 또 몇몇은 서로를 강화시키기도 하여 다른 기질에  합해지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동일한 주요 기질을 가지고 있으나, 서로  다른 종속적인 기질이 그들의 행동,  선입견, 타고난 재능 면에서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이것은 당신이 기질을 12가지 유형으로 연구한다면 좀더 명확해질 것이다.


(1)다혈담즙질

기질의 여러 유형 중 가장  강한 외향적인 사람은 다혈담즙질이다.  왜냐하면 다혈담즙질의 두 가지 기질은 둘다  외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혈질의 카리스마적인 기질은 그를 사람들과 잘 사귀도록 하고, 열정적인 면을 갖도록 하고, 외판원의 특성을 가지도록 한다. 그러나 그의 담즙질적인 측면은 순전히 다혈질적인 것보다 더 조직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이 될 수 있도록 성격의 특성을 제공한다.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과 사귀기를 원하지만  그의 관심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다양성, 활동성, 흥미성이 제공되어야 한다. 다혈담즙질의 잠재적인 단점은 흔히 누구에게나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는 외향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습관적으로 너무  말을 많이 하므로 자신과  자신의 약점을 모든 사람에게 노출시킨다. 그는 매우 독단적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사실을 알기 전에 눈에 띄게 자신을 나타낸다. 솔직히 말하면 입을 조심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만약 그가 정도만 자신을 나타낸다면  사랑스럽지만 만약 그것이 지나쳐서 위험하고 불안정한 사람으로 느껴진다면 그는 점차 미움을 받게 된다. 그의 주된 감정적인 문제는 화를 내는 것이다. 즉 가벼운 자극도 그의 행동을 유발시킨다. 그는 다혈질의 부주의한 면과 담즙질의 고집스러운 궤변이 결합한 까닭에 창조적인 도덕심을 갖고 있지 못하다. 결론적으로 그는 그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람은 다른 기질과 마찬가지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매일 채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12사도들 중 스스로 지도자라 생각한 시몬 베드로는 신약에 나타난 다혈담즙질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말하지 전에 거리낌없이 말해버림으로써 말에 실수가 많았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복음에 대해 더 많이 말했으나 대부분 잘못 말하였다. 그는 이기적이고, 의지가 약하고, 복음을 세속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눈에 띄게 변화된 사람이 되었다. 즉 의지가 굳고, 감화력이 있고, 창조적인 사람이 되었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가? 성령 충만이 그를 변화시켰다.


(2)다혈우울질

다혈우울질은 감정의 변화가 심한 대단히 감정적인 사람이다. 그들은 일분 동안 흥분하여 웃다가 곧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들은 슬픈 이야기를 듣거나, 다른 사람의 곤경을 보거나, 우울한 음악을 들을 때 거의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진심으로 다른 사람의 슬픔을 함께 한다. 강연이나, 연극, 음악, 미술, 등 어떠한 분야도 소화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다혈우울질은 남에게 비판을 가함으로써 다른 이들로부터 소외되기도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기심이나 거만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적대감만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면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 이러한 기질의 결정적인 약점 중 하나는 다혈우울질의 사고력에 있다. 다혈질과 우울질은 둘 다 몽상가이다. 우울질은 그의 사고를 부정적으로 하도록 암시한다. 이것은 다혈우울질의 잠재력을 무가치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도취에 빠져들기 쉽다. 더구나 이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화를 잘 내고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다혈질과 우울질은 둘 다 불안 때문에 고통을 겪으며 그의 잠재력을 활용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그에게는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를 일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계속적으로 하게 할 것이다. 그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한다면 큰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고, 만약 그가 성령과 함께 한다면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종이 될 것이다.

다윗왕은 다혈우울질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이성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비친다. 그는 다채롭고, 극적이고, 감정적이나 의지가 약하다. 그는 하프를 연주하고 노래를 잘하므로 시편에 그의 시적인 재능을 잘 표현할 수 있었으나 결정을 내릴 때에는 충동적이다. 불행히도 많은 우울질들은 충분한 자기훈련을 하기 전에 그의 인생을 마치게 되므로 불미스러운 일과 큰 실수의 연속으로 그의 인생을 망친다. 물론 모든 다혈우울질들은 그들 삶의 일부를 선택할 수도 없고 다윗이 행했던 것을 뛰어넘을 수도 없다. 그들에게는 매일 성령과 동행하여 그와 같은 실수를 피하는 방법이 훨씬 좋다.



(3)다혈점액질

사람들이 가장 쉽게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은 다혈점액질과 같은 사람이다. 지나친 다혈질적인 성향은 상냥하고 태평한 성향의 점액질에 의해 보완될 수 있다. 다혈점액질은 근심걱정 없는 마음과 풍부한 유머를 가진 사람들로, 다른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여러 종류의 물건을 파는 일과 함께 사람들을 돕는 일을 일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다혈질적인 사람들보다 덜 외향적이고 종종 자기 동기적이기보다는 환경이나 상황에 의해 지배되어진다. 다혈점액질은 본래 가정적이어서 자녀들을 매우 사랑하고 그 점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하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려 하지는 않는다.

다혈점액질의 가장 큰 약점은 동기와 훈련의 부족이다. 그는 일하기보다는 사교적이며, 삶을 너무 안일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어떤 경영자는 한 다혈점액질에 대해서, "그는 내가 고용한 사람 중에 가장 멋진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거의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으며, 모든 것에서 좋은 면을 찾고자 한다. 그는 항상 재담의 소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웃김으로써 기쁨을 느끼는데 종종 진지함을 요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다혈점액질이 예수를 가장 중요한 사람의 대상으로 삼을 때, 그는 더 단호하고, 목적의식이 분명하며, 창조적인 사람으로 변화된다.1세기의 복음주의자인 아볼로는 신약에 나타난 인물 중 다혈점액질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바울과 그의 일행에 뒤를 이어 교회를 세운 능숙한 웅변가인 그는 영으로 충만한 설교와 가르침으로 교회의 사역을 잘 감당하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몇몇의 헌신적인 추종자가 있는 이 명랑하고 헌신적인 사람은 굉장히 많은 여행을 했지만 새로운 사역을 찾지는 못했다.


(4)담즙다혈질

기질의 유형들 가운데 두 번째로 강한 외향적인 이 기질은 다혈담즙질을 뒤집어 놓은 것으로 담즙다혈질이라 부른다. 이 사람의 인생은 활동으로 온전히 지배되어진다. 그의 노력의 대부분은 건설적이고, 목적의식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휴식 시간은, 너무나 활동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매우 격렬한 편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잘 사귈 수 있는 매력을 가진 흥행주이며, 외판원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훌륭하게 동기부여를 하며, 도전에 응전 할 때 거의 두려움이 없고, 무한한 힘을 나타낸다. 그의 부인이 말하기를, "그에게는 활짝 열어젖히거나 아니면 닫아버리는 단 두 가지의 형태의 삶의 방식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담즙다혈질인 법정 변호인은 냉철한 판결과 배심을 함으로써 매력을 느끼게 하며 기금 모금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작정한 만큼의 기금을 내도록 할 수 있고, 목회자는 실제적인 성경공부와 교회행정을 조화시킬 수 있으며, 정치가는 그의 지역에서 법령개정에 대한 발언권이 있으며, 한 번 더 그 지역의 대표가 될 수 있다. 그는 논쟁할 때 정확한 근거나 명제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더라도 확신을 가지고 논쟁한다. 교사로서의 그는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뛰어난 전달자이다. 그러나 그는 수학, 과학 또는 추상적인 과목에서는 뛰어나지 못하다.

이러한 사람의 주된 약점은 일반적으로 그의 재능에 적의가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혈질의 성격인 성급함과 폭발적으로 화를 내는 것과 담즙질의 끊임없는 분노가 혼합되어 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는 인성의 유형이다. 그는 자신과 취미나 능력이 같지 않은 사람은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을 매우 솔직하다고 생각한다(몇몇 사람은 그에 대해 빈정대며 솔직하다고 말한다). 그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기 못하며, 그래서 그는 종종 자신이 시작했던 일을 다른 사람들이 끝내주기를 원한다. 그는 독단적이고, 편견이 있으며, 성급하고, 시작하지 말아야 했던 계획을 끝까지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에 통제되지 않는다면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쉽다. 그리고 그의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교묘히 조정하는 일을 망설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담즙다혈질은 그들의 일에 너무 몰두하므로 아내나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들이 불평하면 그들에게 폭언을 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가 언젠가 그의 가족에게 사랑을 주고 그들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는 완전히 가정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

성경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야고보는 담즙다혈질을 잘 나타내준다. 적어도 그의 책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이 책의 중요한 주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선포이다. 좋은 의미로 말하면 담즙질은 일을 사랑한다. 야고보는 담즙질의 실제적이고 논리적인 논법을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대단히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람의 약점에 관하여 그는 야고보서 3장에, "혀는 곧 불이요...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라고 하여 이 기질의 가장 큰 약점을 직접 말하였다. 담즙다혈질은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함부로 말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야고보의 승리는 모든 담즙다혈질에게 의미 있는 본보기가 된다.


(5)담즙우울질

담즙우울질은 매우 근면하고 유능한 사람이다. 담즙질의 낙천적이고 현실적인 기질은 우울질의 까다로운 경향을 극복해주므로 담즙우울질은 목적의식이 분명한 것과 섬세한 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람은 학교에서 잘 지내며, 영리하고 분석적인 마음을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호하기까지 하다. 그는 스스로를 사람들이 항상 특별한 일을 할 수 있는 철저한 지도자로 자신을 계발시킨다. 당신이 어떤 사실에 확신이 없다면 그와 절대로 논쟁하지 말라. 그는 당신에게 도전적인 말투로 조그마한 문제까지도 간섭하여 당신을 난처하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행하는 모든 일에 매우 경쟁적이고 힘이 있다. 그는 고집스러운 탐구자로 그가 추구하는 일의 종류가 무엇이든지 간에 항상 성공한다. 이러한 기질은 아마도 그를 타고난 지도자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조지 에스 패튼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시 미육군 제3군단의 위대한 지휘관이었다. 그가 독일을 베를린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아마도 그의 담즙우울질 기질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장점이 큰 것과 마찬가지로 약점도 그에 못지 않다. 그는 칭찬과 꾸중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명령형의 독재자가 되기 쉽다. 그는 빈정대는 말투로 다른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그는 일하는 습관이 불규칙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천성적인 혁명가이다. 담즙다혈질이 심각할 정도로 적의나 분노를 품고 있어서 부모와 좋은 사랑의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그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특히 그의 가족과의 관계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담즙우울질 아버지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훈육가가 되기 쉽다. 그는 담즙질의 변덕스러운 경향과 우울질의 완전주의가 복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성령에 의해 지배될 때 그의 정서적인 삶은 온전히 변화되고 그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된다.

사도 바울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없이 담즙우울질이었다. 회심하기 전 그는 적의에 차고 잔인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옥에 가두는 일에 그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는 회심한 후에도 그의 굳은 의지는 하나님의 뜻과 경고하심에 반대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비합이적인 고집스러움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의 저서들과 사역에는 실제적이고 분석적인 논법과 자기 희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헌신하여 하나님께서 담즙우울질의 삶을 변화시키는 좋은 본보기가 됐다.


(6)담즙점액질

모든 외향적 기질 가운데 가장 차분한 기질은 담즙점액질이다. 담즙점액질은 성급하고, 활동적이고, 격렬한 기질과 함께 조용하고, 흥분되지 않는 기질이 혼합되어져 있다. 그는 앞에 쓴 외향적인 기질처럼 성급하게 일을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좀더 신중하고 차분하기 때문이다. 비록 처음에는 능력 있게 느껴지지 않지만 그는 매우 유능하다. 그는 계획과 열성적인 작업수행을 잘 조화시키는 조직적인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의 목표가 뚜렷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그와 함께 혹은 그를 위해 일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엄격히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반대하거나 이용당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기관에서의 담즙점액질의 표어가 있다.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일을 조직화시킬 수만 있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모든 분야에서 훌륭한 경영자인 것처럼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될 수 있다.

그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담즙점액질은 눈에 띄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비록 다른 몇몇 기질들처럼 성급하게 화를 내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분노와 모진 마음을 품고 있다. 담즙질의 신랄한 빈정거림은 점액질의 은혜로운 마음으로 극복되어질 수 있다. 신랄한 말과 비평대신에 말의 가시는 영리하게 감춰진 유머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가 농담을 하고 있는지 비웃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 담즙점액질보다 더 고집세고 완고한 사람은 없다. 그는 자신이 한 번 행한 것에 대해서는 그이 마음을 바꾸기가 매우 어렵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보다는 그 실수를 변상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점액질적인 측면은 그의 모험적인 경향을 줄임으로 해서 그의 능력을 전혀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디도는 사도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었고 그레데 섬의 백여 개 교회의 지도자로서 담즙점액질의 기질을 잘 나타내 준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유능하게 성도들을 지도했던 사람으로서 바울이 신뢰하였던 사람이다. 디도서는 바울이 디도에게 쓴 것이며 모든 교사, 특히 담즙점액질을 위해 썼다.


이제 우리는 내성적인 주요 기질을 살펴보고자 한다. 천성적으로 내성적인 두 기질이 열정적으로 변하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기질들도 각기 어느 정도는 유사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존재가 흥미 있는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7)우울 다혈질

우울다혈질은 보통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음악가로서의 그는 청중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충분한 재능을 지녔다. 미술가로서의 그는 그림을 그리거나 아름답게 색칠을 할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그의 작품을 팔 수도 있다. 교육분야에서도 그를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는 훌륭한 학자이고,  아마도 모든 교사들 중 특히 고등학교와 대학교 수준에서 최고일 것이다. 그의 우울질적인 성향은 잘 알려지지 아니한 사실들을 찾아내고, 사소한 일의 습관에도 엄격하다. 반면에 다혈질적인 그의 성향은 그를 학생들과 잘 통할 수 있게 한다.

우울다혈질은 기분에 좌우되는 복합성을 보여 준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는 감정의 창조자이다! 환경이 그를 기분 좋게 할 때는 그는 상상으로도 행복한 분위기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일이 잘못되거나 거절당하고, 모욕당하고, 상처를 입는다면 그의 보다 적은 다혈질적인 성향은 자기 연민의 결과로 바다에 빠지는 것과 같은 분위기에 젖게 한다. 그는 쉽게 눈믈을 흘리고 모든 것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비이성적인 비판을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까다롭게 대한다. 그는 완고한 경향이 있어서 종종 이상적이고 비실제적인 방법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필요없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비참한 자기 모습으로 인해 자주 두려워하고 불안해 한다.

선지자들 중 많은 사람이 우울다혈질이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그리고 그 외의 선지자들이 우울다혈질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가름침을 율법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회개를 외치고, 원칙을 위해서는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며, 헌신적으로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8)우울담즙질

우울질의 단점인 마음의 동요는 항상 우울담즙질의 자기 의지와 결심에 의해 안정되어진다. 이 사람은 직업적으로 할 수 없는 것도, 잘하는 것도 거의 없다. 그는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거의 모든 기술, 건축, 또는 교육을 소화해 낼수 있고, 우울다혈질과는 달리 잡음이나 겉치레 없이 능률적으로 그 자신의 기업이나 사업을 세울수 있고 그것을 능률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지휘자는 거의 우울담즙질이다.

우울담즙질의 천성적인 약점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이나 감정 그리고 말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은 매우 까다로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만족하기가 어렵다. 그들이 한 번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그들 자신도 포함하여)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들과 함께 지내는데 참을성이 없게 된다. 그들의 마음은 그들이 생각하기에 따라 변한다. 그들이 우울질의 기질이 있는 한 계속은 아니더라도 우울한 마음에 더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자기 학대, 적대감 그리고 비평의 성향을 띈 두 가지 기본적인 기질들은 우울질과 담즙질이다. 그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도 분노를 내는 일이 자주 있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생각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충분히 그는 조울증의 환자가 될 수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 그는 가학적 변태성욕자가 될 수도 있다. 악한 생각과 분노, 괴로운 마음에 직면할 때 그는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의 세심한 분석력과 완벽성은 다른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 넣는 사람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거나 긍정적인 마음이 유지되지 않는 한 즐거운 사귐을 가질 수 없다. 그의 아내나 자녀들은 이것에 대해 더 고통스럽게 느낀다. 그는 가족에 대해 혹평을 일삼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수에 대해서 혹독하게 말함으로써 실수를 고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 앞에서도 그렇게 한다. 이 사람은 천성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그의 가족은 그에게 그 사랑을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

성경의 위대한 많은 인물들은 우울담즙질의 기질을 보여준다. 금방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다. 그 하나는 근면한 학자로 그리스도의 삶을 주의깊에 연구하며 주님의 삶의 섬세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의 확장에 이르기까지 가록을 남겨놓은 바울의 꾸준한 여행친구요 의사인 누가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이다. 많은 우울담즙질들처럼 모세는 그의 적의와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제대로 살지 못했다. 하나님께 그의 삶을 내어 맡기기 전에 슬픔과 원한을 품고 사막의 뒷편에서 40년을 허비한 모세처럼, 많은 우울담즙질들은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그의 놀라운 잠재력을 활용하며 살지 못한다.


(9)우울점액질

세계적으로 위대한 학자들 중 몇몇은 우울점액질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 두 우울질처럼 거의 적대감을 가지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잘 사귄다. 우울질의 분석적 완전주의와 점액질의 조직적인 능력이 복합되어 내성적인 기질을 나타낸다. 그들은 좀더 외향적인 기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끝없는 활동범위까지 연구하고 탐구하기 위하여 조용하고 혼자있는 환경을 더 좋아하는 천성을 가진 인도주의자들이다.

우울점액질은 보편적으로 매우 글씨를 잘쓰고 훌륭한 수학자들이다. 이러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인류에게 매우 유익한 사람들이다. 세계의 중요한 발명과 의학적 발견은 대부분 우울점액질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 우울점액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잠재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에 통제되지 않았다면 그는 쉽게 낙심하고 매우 부정적인 사고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비평의 마음을 발전시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기뻐하는 것을 배우면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변화될 수 있다. 대개 조용한 사람은 복수심으로 불타는 그의 성향으로 인해 마음속에 분노와 적의를 능히 가질 수 있다.

우울점액질은 보통 두려움이나 걱정, 그리고 부정적인 자기 모습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 위대한 재능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마음속에 무능한 자기 가치의 감정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며 나는 종종 놀라곤 한다. 그들은 양심적인 성향이 강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힘과 창조성을 소모해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할 때 이러한 사람들은 인격적인 자기훈련과 헌신으로 인해 사랑 받고,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인도주의적인 관점으로 인해 그들의 가족을 경시할 수도 있다. 그들은 자신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거나 자신이 이완되도록 스스로 오락을 즐기지 않는다면 종종 통계상 일찍 죽게 된다.

성경에서 우울점액질과 비슷한 인물은 사랑받는 자, 사도 요한이다. 주의 만찬에서 예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젊은 그는 매우 감성적인 본능을 가졌다. 그는 어떤 사람들에게 너무나 화가 나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리게 해달라고 주 예수께 요청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는 십자가 밑에 서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제자였으며 예수께서 죽을 때 그의 어머니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후에 그 제자는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고 신약 5권의 책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중 두 권(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 책이다.


(10)점액다혈질

12가지 기질가운에서 주어진 시간동안 가장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느긋한 기질은 점액다혈질이다. 그는 명랑하고, 즐겁고, 협조적이고, 사려깊고, 사람들과 잘 사귀며, 외교적이고, 신뢰할 수 있으며, 장난을 좋아하고, 유머가 있는 사람이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두 좋아하는 그는 절대로 성격을 다듬어서 나타내지 않는다. 그는 보통 평온한 삶을 즐기고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모범적이고 가정적인 사람이다. 통상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데 목사가 좋은 동기부여자가 되면 교회에서 그는 활동적인 역할을 맡는다.

점액다혈질의 약점은 너무 순하다는 것이다. 그는 점액질의 동기부여의 부족과 다혈질의 훈련의 부족을 이어받았다. 그는 종종 학교를 그만두어 좋은 기회를 놓친다. 그리고 많은 노력이 수반되는 일은 어떤 것이든 피한다. 두려움은 불안이라는 비현실적인 감정을 강조하는 또 다른 문제이다. 좀더 믿음을 갖는다면 그는 소심한 것과 자기 패배적인 불안을 넘어서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자기 방어적인 껍질과, 곤란하게 하는 것이나 잘못된 일을 하게 되는 것들을 피함으로써 그의 배우자나 자녀들에게는 큰 축복을 주게 된다. 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이러한 행복의 잠재성에 대해 큰 존경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이기적이 아닌 일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일에 스스로 협력해야만 한다.

성경 속의 인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점액다혈질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온유하고, 믿음이 좋고, 착한 천성을 지닌, 사도바울이 사랑하는 영적인 아들 디모데이다. 그는 의지할 만하고, 견고하지만 소심하고,두려워한다. 반복해서 바울은 그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전도인의 일을 하며"(딤후4:5)라고 격려한다.


(11)점액담즙질

여러 점액질 중 가장 활동적인 것이 점액담즙질이다. 그러나 주요 기질이 점액질이기 때문에 그는 절대로 정열적이지 않다. 다른 점액질과 마찬가지로 쉽게 사람을 사귀고 집단에서 뛰어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점액질은 좋은 상담자가 될 잠재성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말을 매우 잘 듣고 내담자가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중단시키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 대해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점액 담즙질이 좀처럼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지 않는 면이 있지만, 그는 조직화된 사무실에서 제일의 전문가가 된다.

만약 그가 성경의 가르침을 받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충고는 실제적이고 유용하며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온유한 마음은 절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위협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바른 것만을 행하고 좀처럼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아내가 그의 수동적인 삶의 방식에 맞추어 나가고, 가정에서 특히 자녀를 훈련하는 데 있어서 앞장 세우지만 않게 한다면 그들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점액담즙질의 약점은 쉽게 나타나지 않지만 점차 표면에, 특히 가정에서 나타난다. 점액질의 동기부여의 부족과 두려움의 문제에 더하여 그는 매우 완고하고 고집이 세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타격을 주지는 않지만 매우 완고하고 고집이 세다. 그는 천성적으로 싸움을 좋아하지 않으나 종종 그의 내적인 분노와 완고함은 침묵 그 자체로 나타난다. 점액담즙질은 종종 직장에 혼자 늦게까지 남아 있거나 밤마다 TV에 맘을 뺏기기도 한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이기적으로 좀더 안주하려는 경향에 빠지게 되고 점차 소극적이 되어간다. 비록 그가 오래 살고 평온한 삶을 살지라도 만약 그가 이러한 소극적인 감정에 빠진다면 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역시 지루한 삶이 될 것이다. 그는 그의 가족의 관심과 욕구에 몰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구약 속의 아브라함이 점액담즙질의 성격을 가장 많이 갖고 있다. 그가 젊은 시절에 행한 모든 것에 두려움의 성격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는 하나님이 그를 처음 불렀을 때 이교도의 도시 우르의 안전함에서 떠나길 싫어했다. 그는 두려움 때문에 두 번씩이나 그의 아내조차도 누이라고 속였다. 결국, 그가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할 때 그의 마음은 변화되었다. 따라서, 그의 가장 큰 약점은 그의 가장 큰 장점이 되었다. 오늘날, 아브라함은 두려움 많은 자라고 알려지는 대신 "주를 믿는자이고, 그는 의를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로 유명하다.


(12)점액우울질

여러 기질의 유형가운데 점액우울질은 가장 친절하고, 온유하며 조용하다. 그는 화를 내거나 적대감을 품는 일이 거의 없으며, 절대로 변명하는 일이 없고 주로 그는 너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남들을 절대로 난 처하게 하지 않고, 항상 합당하게 행하며, 간단하게 말하며, 신뢰할 만하고 정확하다. 그는 자비와 구제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는 단정하고 조직적으로 일한다. 다른 점액질처럼 그는 집 근처에 머물기를 좋아하고 힘이 있는 한 집을 수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만약 그의 아내가 그의 수동적인 경향을 인식한다면(재치있게 가정에서 그가 이끌어 가도록 그를 기다린다면), 그들은 행복한 가정생활의 결혼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그로 하여금 솔선하여 이끌도록 또는 진취적이 되도록 그의 과묵함에 역정을 낸다면 그녀는 불만을 갖게 될 것이며 다툼을 조장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녀들의 풍요한 삶이나 자기 훈련을 위하여 필수적인 훈계를 소홀히 할 것이며, 그래서 마치 성난 폭군이 불합리한 규율로 자기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과 같이 그의 '자녀들을 노엽게 할'것이다.

이 사람의 또 다른 약점들은 두려움이나 이기심, 소극성, 비판적 성향과 가치 정체성의 결여 등에서 두루두루 반복해서 나타난다. 점액우울질이 그의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부정적 느낌들 때문에 성공이 가로막히고 있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는다면 그는 자기의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고, 능력 있는 남자, 남편, 아버지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점액우울질은 자신들의 과다확장이나 과잉 참여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떠한 종류의 가입이나 협력을 거부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점액우울질들이 과잉참여를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일에도 지나치게 참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내면적으로 동기가 부여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틀림없이 자신이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많은 책임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외부적 자극은 그로 하여금 더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점액질들은 압력 밑에서 일을 잘하며 그 압력은 외부로부터 가해진 것이어야 한다. 동기 부여의 가장 위대한 근원은 물론 성령의 능력일 것이다.

1세기경 교회의 경건한 성도였고 첫 번째 전도 여행에서 사도바울과 동행한 바나바는 아무 십중팔구 점액우울질일 것이다. 그는 가난한 자들을 부양하기 위해 초대 교회에 자기 재산의 절반을 헌금한 사람이며, 그의 2차전도 여행에서 요한, 마가(그의 조카)를 수행시키는 문제로 바울과 다투었던 사람이다. 비록 그 다툼이 격렬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바나바는 그의 조카를 데리고 스스로 여행을 진행하였는데 바울은 후에 마가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했다. 신실하고 헌신적이고 온유한 바나바가 인생의 벼랑에 있던 마가를 기꺼이 도왔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마가복음을 소지하고 있다.

점액우울질은 만약 그들이 자기 자신을 삶의 흐름 속으로 움직여 갈 수 있게만 한다면 그리고 자기가 처한 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만 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결핍에 부응한다.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팀 라헤이 저, 황의정 편역, 예찬사) 에서 옮겼습니다.......

 

 

 

                                                                           날적이(日記) 쓰기

 

 

날적이 쓰기는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인데 날적이 쓰기에 대해 자세한 안내를 해 주게 되면 잘 써오게 된다. 날적이를 개인 문집으로 생각하게 하고 시작한다. 내 인생에 대한 비망록이라는 고정관념에서부터 출발한 일기쓰기가 날적이 쓰기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


1. 날적이장 고르기 :

날적이장을 문구점에 있는 공책 중에서 가장 값지고 아름다운 것으로 골라오게 한다. 대충 아무 공책에다가 날적이를 쓰게 하면 그만큼 날적이 쓰기에 공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자기만의 공책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고 날적이장에 애착을 가지게 만들기 위함이다.

 

2. 날짜에 대한 역사 쓰기 :

일년 365일이 모두 같아 보이지만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보낼 수 있도록 역사 기록장으로 날적이 쓰기를 하게 한다. 일간지에는 그 날의 역사에 대해 간단한 메모가 나와 있다. 그 날에 기억할 만한 인물에 대해 소개가 있거나 그 날의 역사적인 사건이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만약 오늘이 5월 8일이면 어버이 날에 대해 역사적인 기록이 나와 있는데, 다른나라에는 어버이 날이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리고 누가 무슨 이유로 어버이날을 정했는지, 어버이날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써 본다.


3. 날씨에 대한 사실과 느낌 쓰기:

우리는 보통 그 날의 날씨를 쓸 때 맑음이거나 흐림 아니면 비가 오다가 맑게 개임이라고 쓴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마니는 이렇게 쓴다. “어제 비가 온 후 눈부시도록 푸른 하늘이 아침을 열었다. 연초록이던 나뭇잎이 더 푸르렀고, 멀리 보이는 산에는 포근한 융단을 깔아 놓은 듯이 연초록과 하얀 꽃, 붉은 꽃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서양화 같다. 그 산 속에 내 몸을 던져 안기고 싶도록 산 빛은 나를 설레게 한다.” 날씨는 일간지나 뉴스에 나오는 날씨 상태에 대해서만 쓰지 않고 이런 날씨엔 밭갈이 하기가 좋고 이런 날씨엔 외출을 삼가야 하며 아침 저녁으로 쌀쌀하니 긴팔 옷을 준비해 가는 것이 좋겠다는 덧붙임 말도 함께 스크랩하여 기록해 두는 것이 좋다. 날씨에 대해 자세한 반응을 보이게 되면 자연 변화에 대한 자기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사물을 관찰하거나 사람 감정의 변화도 읽어내는 장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4. 이 주에 생긴 사건 :

이번 주에 일어난 사건을 기사문으로 정리하여 쓴다. 내가 겪은 일과 보도된 내용을 간추려 기록하고 싶은 것을 쓴다. 이 때 쓸거리는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을 정하여 골라야 한다. 일상적으로 반복해서 일어나는 사건은 가급적 피하고 기록해야만 하는 당위가 있는 사건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먼저 보도문 형식으로 정리하여 쓴다음 내 생각을 첨가하여 해설까지 곁들이는 것이 좋겠다. 특히 보도된 내용을 쓸 때는 꼭 스크랩 자료를 첨부한다.


5. 이 주에 만난 사람 :

우리는 매일 사람을 만난다. 직접 만나기도 하지만 매스컴을 통해 또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내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에 대해 하나씩 풀어나가는 과정이다. 먼저 자기 둘레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물론 가족이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보면 알긴 하지만 아주 자세하게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가족을 중심으로하여 자기 둘레에 있는 사람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써 내려간다. 이 때 글쓰기 방법은 정밀묘사하기이다. 소설가 이문구는 ‘글밭을 일구는 사람들/문이당 발간’이란 책에서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문인들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는데, 그 글을 읽다보면 그 사람에 대해 아주 자세한 정보를 얻게 되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만약 학생이 ‘우리 담임’이란 대상을 설정하고 쓰기 시작했을 경우엔 담임의 외모, 성격, 자질구레한 특성,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예컨데 옷차림의 특징이라든가, 일상적인 버릇이라든가, 독특한 언어사용이라든가, 화를 낼 때의 모습, 난처할 때의 표정 등 등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기를 한다. 이렇게 자기 둘레에 있는 사람에 대해 써 내려가다보면 나와 관계하고 있는 환경이 보이게 되고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존재일까?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가지게 된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성찰해 보는 게기를 한 번씩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6. 이 주에 만난 공간 :

이 과정도 정밀묘사하기 방식으로 쓴다. 내 둘레에 있는 다양한 공간 묘사하기를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지점을 확인하고 내가 좋아하는 곳, 나를 살리는 곳, 내가 싫어하는 곳, 나를 죽이는 곳 등 자기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공간이 내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정밀묘사하기를 꾸준히 하게 되면 관찰력과 집중력이 살아나게 되고 글쓰기 실력도 자연스레 좋아지게 된다. 글쓰기 훈련을 따로 하는 것보단 이런 방식을 일상적으로 해 보는 것이 오히려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교사는 아이들이 쓴 글을 보고 아이들이 가지고 잇는 사고력을 느낄 수 있어 지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사고력이 좋은 학생일수록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기를 할 수 있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간감감력과 지각력도 좋아지게 된다. 어떤 공간을 묘사할 때는 먼저 그 공간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그려야 한다. 약도를 그리거나 지도를 그려야 하기도 하므로 공간지각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이 사고력을 키워주는 효과도 함께 얻게 된다. 논술을 통해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사고력을 가지게 하는 훈련은 이런 과정을 꾸준하게 연습함으로써 일정하게 도달할 수도 있다.


7. 이 주의 문화 :

이번 주에 내가 소비하였거나 생산에 참여한 문화할동에 대한 기록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았거나 책을 읽었거나 만화를 보았거나, 공연에 참여하거나 보았을 때, 아무것도 없다면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중에서나 일간지에 실린 신간 안내라도 좋다. 또한 친구들과 어울려 놀이를 한 것도 좋다. 우선 문화할동 내용에 대해 객관적으로 정리하여 쓴다. 예컨대 영화를 보았다고 하자. 영화 입장권이나 팜플렛을 붙이고 영화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쓴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소감을 비평형식든 감상 형식이든 하나를 정해 쓴다. 영화에 대한 내용을 정리할 때는 생각그물을 활용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8. 이 주에 만난 말 :

우리는 매일 말 속에 파묻혀 산다. 내가 말을 하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듣기도 하고 읽기도 한다. 어쨌든 말과 더불어 하는 삶에서 말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게 한다. 말은 참 묘한 것이어서 말 들을 때 감정이나 장소, 시간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리고 매일 반복해서 듣는 말이 있는가 하면 가끔씩 전혀 생소한 말을 듣기도 한다.

우선 내가 매일 듣고 있는 말부터 정리한다. 이 방식은 총체적 언어학습법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총체적 언어 학습법이란 하나의 낱말을 두고 관련되는 모든 것을 연상하여 생각그물을 그리면서 관계지은 다음 (브레인 스토밍)  그 낱말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쓰임과 의미를 알아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습자가 가지고 있는 언어세계와 기호의 세계를 점차 확대해 나가는 방법으로써 내가 알고 있는 세계를 낱말지도로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예컨대 ‘가족’이란 낱말을 중심에 두고 생각그물을 그린다고 가정해 보자. 먼저 가족 구성원을 왼쪽 주가지로 그릴 수 있다. 가족 구성원에는 엄마, 아빠, 형, 동생 등으로 확대해 나가고 엄마는 다시 주부 - 도우미 - 잔소리꾼 - 요리사 - 화수분 - 기독교인 - 앞치마 - 청소 - 드라마 중독증 - 화장 등등으로 확장해 갈 수 있다. 오른쪽 주가지로는 가족이 하는 일, 위쪽 주가지로는 가족 10대 행사를 갈래를 넣어 써 나가고, 아래족 주가지에는 우리 가족이 바라는 점 등등으로 주가지와 부가지를 확장해 나간다. 생각그물에 대해 잘 모른다면 ‘낸시 마굴리스’가 쓰고 영교 브레인 파워에서 펴낸 「마인드 맵 배우기」를 참조하시면 된다.

총체적 언어 학습법에 따라 매주 한 낱말에 대해 자기 생각을 정리해 나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휘력이 증진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언어 구사력이나 독해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에게 훈련삼아 해 보는 것도 좋겠다.


9. 이 주에 만난 환경문제 :

환경에 대한 폭넓은 사고를 하기 위해 거의 매일이다시피 언론에 등장하는 환경 문제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자기 생각을 덧붙이는 작업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최근에는 「생명복제」문제가 빅 뉴스로 부각되고 있고, 특히 환경 호르몬에 관련된 기사나 다양한 기상이변 보도도 빼 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또한 우리 둘레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환경 문제 즉, 영월 동강댐 건설 문제나, 골프장 건설로 인한 생태계 파괴 문제, 물부족 사태나 수질 오염 문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생태마을이나 공동체 마을에 관한 기사 등등 이루헤아릴 수 없을 만큼 환경과 관련된 보도는 많다. 환경과 관련된 자료를 스크랩 한 후 반복적으로 보도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사분석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도 있다.

그리고 우리 동네 생태환경과 생활환경에 관한 꾸준한 관찰과 문제 분석도 좋은 꺼리이다. 우리 동네에서 발생하는 문제나 우리 동네에 자라고 있는 다양한 동식물에 관한 관찰기록 일지를 만들어 보는 것도 훌륭한 공부라고 본다.


10. 이 주에 되돌아 볼 점 :

이번 주 내 생활을 되돌아 보고 고쳐야 할 점이나 반성해야 할 점을 찾아 기록하고 자신이 실천해야 할 내용을 스스로 작성해 자기 생활에 대해 겸허하면서도 철저한 태도를 가지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칭찬받을 일이나 기뻤던 일도 기록한다. 보람된 일이나 의미있었던 일들도 기록해 두는 것이 좋다. 이 기록에는 우리 가족이 겪은 사건이나 가족 행사에 대해서도 기록해서 가족사를 구성해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날적이에 쓸 꺼리는 무척 많은데 쓰는 일이 보통 고된 일이 아니다.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이 매일 꺼리를 찾아 쓰게 하려는 것은 논술 학습을 통해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생각을 집중하여 쓰게 하는 훈련방식보다는 이렇게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글감을 찾고, 문제점을 발견하여 자기 생각을 정리하게 하는 것은 원래 논술공부가 가지는 취지와도 맞아 떨어진다. 교육과 삶을 철저히 분리하는 삶을 살게 하려는 것에서부터 벗어나와 앎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자기 노력이 더욱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날적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정확하게 살펴보게 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것과 가져야 할 것을 뚜렷이 알게 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고민을 하나씩 완성시켜 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미 성장이 멈추고 빠르게 노화상태로 돌입해 있는 우리 교사들도 매일매일 자신을 성찰하는 창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모둠 날적이 쓰기


위에 적은 개인별 날적이 쓰기에다가 다음 한 가지를 더 넣어 모둠 날적이를 쓰게 한다. 모둠 날적이는 모둠원이 한 주씩 돌아가며 쓴 후 다음 구성원에게 넘겨 주고, 모든 구성원들이 이어가며 한 주씩 쓰게 된다. 한 모둠이 보통 열명일 때 11주만에 자기 차례가 돌아오게 된다.

모둠 날적이를 쓸 때는 자기 이름을 쓰지 않고 별칭을 사용하게 하는데 익명으로 하게 되었을 때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모둠 날적이에는 매뉴가 한 가지 더 들어가는데 그것은 수업 한 날 수업에 대한 기록이나 평가, 소감을 기록하게 한다. 모둠 날적이를 쓰게 되면 따로 문집을 만들 필요가 없게 되고 모둠원이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며 끈끈한 동지애를 느끼게 되기도 하는 장점이 있다.

이 방식을 자신의 가정에 도입하면 가족일기장이 만들어 진다. 사무실에서는 동료들과 함께 돌려쓰는 사무모둠일기가 되기도 한다. 가족 일기를 쓰게 되면 쓰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가족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서로가 가지게 되어 화목한 가정 만들기는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모둠 날적이에 교사도 참여한다면 더 좋겠다. 평소 아이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맘껏 쓸 수 있는 기회이므로 아이들도 무척 관심을 가지게 되고 모둠원이 날적이에 애착을 가지게 되어 수업 분위기가 한결 밝아지고 좋아진다. 모둠원끼리 서로의 삶에 대해 무엇인가를 나누고 서로의 삶에 대해 개입하는 여지가 생기게 되어 우정 이상의 사랑이 만들어지는 눈물겨운 체험장이 되기도 한다.

 

 

 

 

                             나를 살리고 서로를 살리는 들공부



글 차례


1. 현장체험학습과 들공부 열풍

2. 현재 진행되고 있는 들공부의 여러 모습

3. 들공부에서 발견되는 문제점

4. 들공부 왜 해야 할까?



1. 현장체험학습 열풍과 들공부

 

지난 1990년대에 접어들어 우리 나라 제도권교육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열린교육이 초등과정부터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도입되었습니다. 교과서 중심- 교사 중심의 주입식 교육 - 전근대적이며 학습자 개인의 개성을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인 커리큘럼 - 공급자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탈교과와 통합교과의 형성 - 학생 중심의 자발성에 근거한 교육 - 수요자 중심 교육으로 획기적인 변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아직 전면적으로 확산되고 있지는 않지만, 대학입학전형에서 학력고사를 폐지하고 고차원적인 수학능력을 테스트 하는 수학능력시험제 도입과 논술시험 실시는 엄청난 파고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독서열풍이 불었고 사고력과 창의력 키우기 교육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제도권 밖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술 교육은 엄청난 사교육 시장을 형성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미국식 열린교육의 방편으로 아이들에게 체험학습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제 약 10여년의 과도기와 잠복기, 실험기를 거쳐 내 후년인 2002년부터는 모든 제도권 교육이 열린교육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교육부의 장기적 정책전략인 비젼2002 프로젝트에 따라 모든 중고생들에게 수행평가가 적용되고 이에따른 프로젝트 수업, 직소우 수업 등이 학교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학교 밖 사회교육권에서는 체험학습․현장학습․열린학습의 이름으로 다양한 방식의 열린교육이 상품화 되기에 이르렀고, 아이들이 이런 교육상품을 구매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며 실제로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제도권인 학교 안에서도 현장체험학습은 특별한 요일과 시간을 일정하게 정해 두고 지속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열린수업의 날’, 혹은 ‘책가방 없는 날’ 이란 이름으로 아이들은 현장체험학습을 하러 올림픽공원이나 서울대공원 또는 롯데월드로 갑니다. 왜 그런 곳으로 가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기리 놀다가 집으로 가고 선생님들은 출석을 부른 후 아이들을 풀어놓고 뒷짐을 지다가 돌아갑니다. 왜 이러고 있는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매년 봄 가을에 정레적으로 열리는 ‘소풍’도 ‘현장견학’이란 이름으로 대체되었고, 아이들은 도시락을 싸들고 어디론가 현장을 향해 달려갑니다. 중고등학교에서도 수학여행이 ‘현장체험학습’으로 둔갑되었습니다.

해오름에서도 지난 98년부터 ‘들공부’라는 이름으로 아이들과 함께 매달 한 두차레 현장학습을 다니고 있으며, 여름과 겨울방학에는 계절학교를 자연공간에서 열고 있습니다. 그동안 해오름에서 열었던 들공부는 해오름교사조합 소식지에 매달 실었으므로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들공부 개념적 이해

‘들공부’란 교실 안, 혹은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수업을 탈피하여 교실밖에 있는 다양한 수업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체험하는 현장수업을 일컫는 말입니다. 교과서 중심, 책 중심의 텍스트를 해체하고 우리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교과서이며 텍스트라는 확장된 개념의 통합적 종합적 학습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 ‘들공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만나는 다양한 주제를 관념적으로, 문자언어 중심으로 학습하던 방식을 탈피하여 직접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오감체험 즉, 감성인식을 주로 하는 또다른 개념의 총체적 학습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우리 교육의 고질적 문제는 書自書 我自我(서자서 아자아) 즉, 글은 저 혼자만의 글이고 나는 나대로 인 다시말하면 배움(지식,앎)과 삶(실천)이 철저하게 분리된 것에서 출발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자신의 삶으로 오지 않고 기능하는 분야에서만 효용성을 발휘하는 지극히 분절적인 교육이 파행적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또는 공부란 것은 ‘즐겁고 진지하며 깊은 가운데서 느끼며, 그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깨닫는 일’임에도 이것 하나를 배워서 무엇에 써 먹어야지 라는 기능적이고 효용론적인 관점에서만 추구되어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부에는 익힘, 탐구, 추구, 수행, 자각, 창조란 개념이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한 부분만을 보고 따르려는 경향이 우리 교육을 지배해 왔음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들공부’ 활성화는 편향적이고 분절적인 교육에서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교육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 의미에서 교육을 통해 이루려는 가치인 ‘진선미眞善美’를 실천하기 위한 두 가지 실행방법으로 문무예文舞藝와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들 수 있습니다. 즉 참되고 착하며 아름다운 인간인 전인적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문무예를 동시에 수행하고 탐구하며 익히고 자작함으로써 신언서판身言書判 몸을 바르게 세우고 올바른 말을 하며 지헤를 갖추어 현명한 판단을 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 교육의 궁극적 목표점이 아닌가 합니다. 주체적인 아이, 자립적이고 자주적이며 자생력을 갖춘 아이가 되었을 때야 서로 돕고 살아가는 진선미眞善美의 가치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교육에서 가장 부족한 점이 있다면 이러한 전통적 의미의 사람을 살리는 교육, 내가 살고 서로를 살리는 교육의 가치가 제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들공부는 이러한 전통적 의미의 교육을 다시 시도하고자 하는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현재 봇물 터지듯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현장체험 수업이 이러한 가치를 담고 진행되고 있는지, 또는 진정한 의미에서 열린교육의 일환으로 추구되고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한 번 따져보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거나 또다시 아이들에게 학습부담을 주고 학부모에게는 교육비만 과도하게 가중시키는 일이 아닌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해서 ‘들공부’에 대해 좀 더 바람직한 가치체계를 이해하고 교육의 이름으로 열리는 ‘들공부’가 진정한 의미에서 교육적 목표를 담지하고 가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런 일련의 성찰을 통해 우리가 가야할 교육의 방향성을 검토해 보는 것은 「배․남」이 꾸준하게 주장해 왔던 교육적 발언과도 일맥상통하는 일이라 여겨집니다.



2. 현재 진행되고 있는 들공부의 여러 모습

 

지난 94년부터 대구에서 ‘민들레 만들레’ 여름 계절학교가 초등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꾸준히 열려왔는데 지금까지 현장체험학습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또하나의 문화와 따로 또같이 대안교육 그룹이 연 ‘따또학교’, 자유학교를 준비하는 물꼬가 충북 영동 산간지역에서 여는 ‘물꼬 계절학교’, 성남지역에서 대안교육의 장을 열어가고 있는 ‘여럿이 함께 만드는 학교’의 다양한 현장체험 학습은 제도권에서 경탄해 마지 않을 정도로 좋은 성과를 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해오름에서도 지난 96년부터 여름과 겨울에 ‘나를 살리는 들살이’라는 주제로 계절학교를 열어왔고, 지난 98년부터는 매달 주제가 있는 들공부를 열어왔습니다.

이제는 사회의 다양한 영역과 부문에서 들공부가 봇물터지듯 열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문화센터나 언론사에서, 도는 사회학술단체나 연구기관에서도 현장체험학습을 하고 있고 아이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들을 영역별 주제별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생태환경을 체험학고 생명학습을 주제로 삼는 ‘들꽃기행’, ‘갯벌기행’, ‘수서생물관찰’, ‘철새나 조류탐조’, ‘환경생태연구’이 있는데 이티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두밀리 자연학교’나 생물학자인 류창희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의왕생태연구소마당’, 이 있고 ‘두레기행’ 전문팀이 여는 각종 생태교실이 있으며 환경운동연합이나 참여연대, 한겨례신문사, 다물학교가 주최하는 이벤트형 자연교실이 있습니다. 이런 들공부에는 주로 그 분야 전문가가 아이들에게 전문적인 지식을 쉽게 전달해 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1회성 이벤트로 그치는데 한계성과 문제점이 노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으로는 역사기행과 전통문화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견학’, ‘고궁알기’,‘선사유적지 탐방’, ‘역사유물 및 사적지 기행’등 있는데 이 또한 그 분야 전문가를 모시고 주로 강사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경험의 폭을 넓히는 데는 일정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전통과 역사에 대한 인식을 주마간산 격으로 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현장체험학습의 일반적 방법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시장이나 사건현장, 또는 시청 등 관공서나 공장 및 기업체, 언론사 등을 탐방하여 현장이 가지고 있는 기능적인 부분을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방식의 들공부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장체험학습을 가장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 ‘삶의 체험 현장수업’을 들 수 있습니다. 즉 농사체험이나 노동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들공부를 말함인데, 이 분야는 아직 들공부를 여는 쪽이나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선호도가 떨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는 체험에 참여할 시간이 많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만 익숙해져 온 아이들에게는 여간 힘들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작勞作을 중심으로 하는 들공부는 어찌보면 들공부를 해야하는 기본적인 취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3. 들공부에서 발견되는 문제점


들공부 중요성이 의식 있는 학부모로부터 교사, 학교 밖 현장에 있는 사회교육선생님에게로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매주 곳곳에서 들공부가 열리고 있습니다. 재빠르게 상품성을 확인한 이들은 다양한 들공부 상품을 내 놓고 있으며, 이젠 들공부가 상업적으로 활개치는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엉성하기 이를데 없는 비교육적 기획에 따른 들공부가 신문에 광고되고, 동식물학자, 환경학자, 역사학자를 자칭하는 상업적전문가들이 공공연하게 아이들을 불러 모으고 있으며, 백화점 문화센터나 언론사들도 현장체험학습을 기획상품으로 팔기 시작했습니다. 제도권에서는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현장체험학습을 따라잡을 엄두가 나지 않아 형식적인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며, 많은 아이들 인솔에 따른 사고위험 부담으로 오히려 현장체험학습을 기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몇몇 용기 있는 교사들 외에 들공부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학교 밖에서 이루어지는 들공부도 아직 초보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들공부의 문제점은 아직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한 교육 전체의 관점에서 들공부를 설정한 것이 아니라 또다시 필요성에 의해 급조된 점이라는 점입니다. 왜 들공부가 필요한 것인가, 들공부를 통해 무엇에 도달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우선 시작하고 보는 것입니다. 창의성을 키워준다니까, 또는 아이들에게 폭 넓은 경험을 하게 해 준다니까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이벤트성 들공부가 판을 치고, 들공부를 하기 위한 들공부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루 시간을 내어 들꽃을 보고 오고, 갯벌에 살고 있는 생물을 관찰하는 일이 결국은 누가 좀 더 많이 알고 있나를 경쟁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입니다. 아이들이 모르고 있는 세계를 확장시켜 준다는 것 이외엔 다른 성과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들공부가 아이들 교육에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교훈을 얻어 볼까요.

에를 들어 일본의 대안학교로 유명한 ‘키노쿠니 자유학교’로 불리는 초등학교에서는 일년 동안 모든 어린이들에게 나무나 꽃, 개구리 등 생명체를 스스로 정하게 한 후 직접 심어 키우게 하거나 기르면서 관찰하게 합니다. 성장과정과 변화하는 모습을 꼼꼼하게 기록하게 하고, 그림이나 사진으로 채록하면서 모르는 점을 백과사전이나 선생님께 질문하게하여 스스로 문제점을 발견하고 해결하게 하는 방식을 모든 아이들에게 터득하게 합니다.

일년이 지난 후 기록관찰 공책을 발표하게하여 그것을 자신의 교과서로 인정하게 합니다. 초등 저학년 어린이 조차도 한 분야에 대해서는 깊은 전문적 지식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관찰을 통해 그 생명체와 교감하는 방식도 터득하게 되어 생명에 대한 가치, 동식물이 성장하는 과정과 방식,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 등에 대한 이해와 감정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키노쿠니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방식은 지속성과 체계성, 전문성입니다. 아이들을 자연생물과 항상 밀착하게하여 관심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며, 스스로 궁금증을 자아내게하여 호기심을 발동시켜 깊이 있게 연구하고 탐구하는 자세를 가지게 합니다. 어렵거나 모르는 사안에 대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그 방식도 스스로 찾아가게 하는 것. 우리 안에 없는 것들입니다. 자연 생물에 대한 이해를 관념적으로 하게 하지 않고 느낌과 감성, 오감을 통해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함으로써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 발도로프 학교나 미국의 자유학교들도 교실 안에서보다 밖에서 많은 체험을 하게 합니다.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게획적이며 체계적으로 지속하여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세계상을 정립하게 도와 줍니다. 밖에서 보고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있게 교감하게 하려는 시도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 교육에서 겉핥기를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에 진행되고 있는 들공부는 이제 시작단계이므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고 교육철학을 담지한 들공부로 전환하여야 할 시점입니다. 아이들을 밖으로 데려갈 때마다 이 교육이 진정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인가를 자문해 보는 버릇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4. 들공부 왜 해야할까?


들살이에서 기계스런살이로

오랫동안 잔뜩 지푸렸던 우울한 봄 하늘이 활짝 열립니다. 맑고 환한 햇빛이 내 마음을 환하게 해 줍니다. 비가 내리지 않아 먼지만 풀풀 날리는 밭을 갈고 있노라면 마음마저 먼지처럼 어지럽게 풀풀 날라 다닙니다. 살금살금 봄 비가 내렸습니다. 찔끔찔끔 거리면서도 땅을 촉촉히 적셔 줍니다. 내 마음도 촉촉히 젖어 옵니다. 쬐금 내린 비에도 연한 잎들이 살아 움터 오르고 들판과 산은 온통 연녹색과 흰색, 붉은 색으로 어우러진 봄 단풍으로 출렁 거립니다. 그 들판과 산을 보노라면 마음이 찡해져 옵니다.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그 아늑한 자연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그래서 봄 빛으로 가득한 대자연을 어머니 포근한 품으로 이야기 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연녹색과 푸른 하늘이 서로를 시샘하듯 제 빛을 내기 시작하면 내 마음도 덩달아 맑고 푸근해져 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에서 멀어지면 스스로 삭막해져 버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원래 사람은 들에서 나고 자라며 살다가 다시 들로 돌아가게 됩니다. 들살이가 곧 인생이었습니다. 들꽃과 놀고 들짐승과 어울리기도 하며 들풀처럼 살았습니다. 들판에 씨앗을 부려 생명을 키워내고 들판에 의지하여 목숨을 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들에 대한 고마움을 놓아두지 않고 들을 사랑하였습니다. 봄이면 피어나는 나뭇잎들이 보며 생기를 되찾았고, 여름이면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 아래 더운 몸을 식혔습니다. 밤이면 땔감이 되어주는 나무에 의지하여 피곤한 몸을 따뜻하게 풀었습니다. 들사람인 우리가 들에게서 생명을 얻고 기쁨을 누렸습니다. 들이 슬퍼지면 사람도 슬퍼졌고, 들이 아파하면 사람도 고통을 함께 느껴야 했습니다. 그래서 노자께서는 물아일체物我一體 범아일여梵我一如라 했습니다. 사람과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라 했습니다. 서로가 공생共生 하며 상생相生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들에 가려면 시간을 내어야 하고 들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안(도시, 인공 공간)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늘 바깥 세계를 그리워하면서도 안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젠 아예 들살이에서 멀어졌습니다. 자연스런 들살이는 사람살이를 느긋하고 평화롭게 하였습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고 서로 도우며 일을 하였으며, 먹을 것은 서로 나누었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함께 아파할 줄 알았고, 어려울 때이면 더욱 더 서로를 도왔습니다. 남을 동정하고 이해하며 배려하는 삶이 특이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3,4십년 전에만 해도 그런 삶이 곧 우리들 사람살이였습니다.

들에서 멀어진 현대 도시인들의 삶은 삭막하고 건조하며 따분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먹이를 확보하기 위해 우리들 현대 도시인들은 밤낮없이 일하고 경쟁합니다. 들판에 자라나는 식량을 키우는 농부의 들살이는 지금 당장 먹을 것 없어도 배가 불렀습니다. 쑥쑥 키가 자라나는 보리와 벼들을 보면서 삽질 하나에도 신이 났습니다. 허리가 휘어지도록 땅을 파 헤짚으면서도 고통보다는 생명을 키우는 즐거움과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현대 도시인들이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머리를 쓰고 손가락을 써 대지만 한달에 한 번 던져지는 먹이감은 항상 허전할 뿐입니다. 다음 달 먹이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때까지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들판에 의지하는 들살이의 여유는 이제 온데간데 없습니다. 들살이에서는 학교가 따로 없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학교였습니다. 모든 어른들이 교사였습니다. 마을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배우고 자라나는 교육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뺑뺑이 돌리는 학원도, 성적에만 관심두는 부모님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경쟁해야 할 학급친구들도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짬을 내어 오락실에 갑니다. 짜투리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펌프에 몸을 맡기고 땀을 흘립니다. 그러나 즐거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지하 PC방에서 혼자 스타크래프트에 열중하고 있는 초등 어린이 모습은 너무나 신중하고 진지하여 말 붙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컴퓨터와 텔레비전이랑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공부도 놀이도 컴퓨터와 텔레비전과 함께 합니다. 함께 모여 노는 아이들을 찾아보기가 참 힘들어졌습니다. 아파트 놀이터 철제나 목재로 만들어진 놀이감들도 아이들에게 시시합니다. 괴기하게 생긴 외계 괴물들을 몰고 다니면서 진지를 만들고 전투를 벌이는 일이 더 신나기 때문입니다. 사람보다는, 나무보다는 기계가 더 친숙합니다. 아이들 마음은 기계스런 감각과 감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 어른들도 그렇습니다. 화를 잘 내고 분을 참지 못하며 남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생각하기보다는 남을 경쟁자로 여기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우리는 기계에 둘러싸여 기계와 더불어 살아갑니다. 딱딱한 플라스틱과 차가운 금속성의 물질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플라스틱과 기계를 소유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플라스틱을 만지고 기계와 친해집니다. 점점 더 우리 마음은 기계처럼 플라스틱처럼 딱딱해져만 갑니다.

기계에서 만들어 주는 밥을 먹고, 기계에서 뽑혀나온 옷을 입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변기를 타고 앉아 똥을 누며, 매연을 팍팍 뿜어대는 기계를 타고 이동하며,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기계처럼 뻗뻗하게 몸을 움직여 춤을 춤니다. 그리고 기계가 만들어 준 침대에 몸을 누입니다. 기계 속에서 온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다가 문득문득 생각나면 가끔씩 들판으로 갑니다. 푸른 하늘을 만나고 녹색 들판을 만나고 거울처럼 맑은 시냇물을 만나면 이젠 감정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잠시잠깐동안 “참 좋구나! 사람은 이런데 살아야 하는데” 하고 한숨을 쉽니다. 그러다가도 한가로움이 부담스러워지고 곧 지겨워 집니다. 바쁘지 않으면 살아가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눈 앞에 어지러운 것들이 팽팽팽 돌아가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집니다. 우리 사람들은 이젠 정말 참으로 이상해졌습니다. 그 이상함이 이젠 더 자연스러워 졌기 때문입니다.


기계스런 살이를 벗어 던지고 다시 들 정신, 들 얼을 찾아

다시 아이들 교육을 생각합니다. 다시 아이들 삶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사인 어른들(모든 어른들은 아이 앞에서 교사이므로) 삶을 생각합니다. 자연이란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 도시인들인 우리 마음 속에는 기계스런 생각과 욕망으로 가득차 있음을 몸서리쳐지게 느낍니다.

더 많은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더 안정적인 먹이를 확보하기 위해 현대도시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연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은 사치입니다. 물질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전원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것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마음 속 깊이 꿍쳐넣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메마른 도시에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새 아이들에게도 우리들 삶을 전수합니다. 나중에 잘살려면 지금 열심히 해야 돼! 우리는 아이들에게 끝없이 공부를 강조합니다. 아이들도 지레 겁먹고 열심히 따라합니다. 그러다가 스트레스를 팍팍 받고 오락실로, 피씨방으로 몰려가 때려부수는 게임에 몰입합니다. 우리들도 우리 아이들도 점점더 전투적인 인간으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먹고 먹히는 경쟁에 삶을 던집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교육」을 이야기 합니다. 교육! 나를 죽이고 너를 죽이고 모든 사람을 죽이는 살벌한 경쟁교육에 온 몸을 불사르고 있습니다. 모든 재산을 걸고 있습니다. 모든 시간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교육이란 이름으로 어른된 자들이 어린이들에게 강요하거나 수행하게 하는 공부는 정말 무엇일까요? 국어,수학,자연 등 교과목부터 시작하여 열린학습, 체험학습, 수행평가 등 제도권 학교교육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들은 정말 우리 아이들을 살리는 교육일까요? 또한 학교 밖 사회교육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과외 학습, 예체능 관련 공부나 수련 등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일까요?

아이를 살리는 교육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교육

들살이로 돌아가야 합니다.

들에서 길을 발견하고 들에서 진리를 깨달으며 들에서 생명을 느끼는 교육이 되살아나야 합니다.

짜증을 잘 내는 아이, 참을성이 없는 아이, 버릇 없는 아이, 남을 생각할 줄 모르는 아이,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줄 모르는 아이, 어른들 빰치는 탐욕스런 아이, 욕 잘하는 아이, 거짓말 밥먹듯 하는 아이, 남을 우습게 여기는 아이, 남을 질시하거나 함부로 무시하는 아이, 남을 패는 아이, 여유가 없어 조급증에 빠진 아이,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 전혀 도덕성이 없는 아이,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 선생님을 우습게 여기는 아이, 돈을 함부로 쓰는 아이, 군것질만 밝히는 아이, 귀중한 것을 모르는 아이로 가득차 갑니다. 우리 어른들은 한탄합니다. 요즘 아이들 못 쓰겠다고…….

어른들도 그럽니다. 그런 어른들 밑에서 자라는 아이는 당연히 이렇게 성장합니다. 교육은 사라지고 경쟁만 남았습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 가열차게 치열한 경쟁을 펼쳐가는 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몸도 병들고 마음도 병들어 늙고 지친 후에야 후회하게 됩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진정한 길은 경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경쟁보다는 조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하기보다는 작은 것에 고마워 할줄 아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그런 마음이 경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미국 서부지역에 거주하던 두아미쉬-수쿠아미쉬族의 인디언 추장인 시애틀의 글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는 1854년 미국대통령 피어스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땅을 팔 것을 제안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편지로 답을 보내었습니다. 이 글은 생명을 중시하고 자연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모범으로 회자되는 글이기도 합니다.  


추장 시애틀의 편지.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워싱턴의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냈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친절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 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가족이다.

워싱턴 대추장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온 것은 곧 우리의 거의 모든 것을 달라는 것과 같다. 대추장은 우리만 따로 편히 살 수 있도록 한 장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안을 잘 고려해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이 땅은 거룩한 것이기에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울과 강을 흐르는 이 반짝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피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팔 경우에는 이 땅이 거룩한 것이라는 걸 기억해 달라. 거룩할 뿐만 아니라,호수의 맑은 물 속에 비추인 신령스러운 모습들 하나하나가 우리네 삶의 일들과 기억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음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물결의 속삭임은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가 내는 목소리이다. 강은 우리의 형제이고 우리의 갈증을 풀어준다. 카누를 날라주고 자식들을 길러준다. 만약 우리가 땅을 팔게 되면 저 강들이 우리와 그대들의 형제임을 잊지 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형제에게 하듯 강에게도 친절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아침 햇살 앞에서 산안개가 달아나듯이 홍인은 백인 앞에서 언제나 뒤로 물러났지만 우리 조상들의 유골은 신성한 것이고 그들의 무덤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 이 언덕, 이 나무, 이 땅덩어리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백인은 우리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에게는 땅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똑같다. 그는 한밤중에 와서는 필요한 것을 빼앗아 가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땅은 그에게 형제가 아니라 적이며, 그것을 다 정복했을 때 그는 또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백인은 거리낌 없이 아버지의 무덤을 내팽게 치는가 하면 아이들에게서 땅을 빼앗고도 개의치 않는다. 아버지의 무덤과 아 이들의 타고난 권리는 잊혀지고 만다. 백인은 어머니인 대지와 형제인 저 하늘을 마치 양이나 목걸이처럼 사고 약탈하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대한다. 백인의 식욕은 땅을 삼켜 버리고 오직 사막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홍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홍인은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대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공기는 그것이 지탱해 주는 온갖 생명과 영기(靈氣)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기억해야만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베풀어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준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명의 기운을 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로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개인이니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나는 초원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많은 물소를 본 일이 있는데 모두 달리는 기차에서 백인들이 총으로 쏘고는 그대로 내버려둔 것들이었다. 연기를 뿜어대는 철마가 우리가 오직 생존을 위해서 죽이는 물소보다 어째서 더 중요한지를 모르는 것도 우리가 미개인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짐승들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든 짐승이 사라져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들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맺어져 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우리 조상의 뼈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이 땅을 존경할 수 있도록 그 땅이 우리 종족의 삶들로 충만해 있다고 말해 주라.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을 그대들의 아이들에게도 가르치라. 땅은 우리 어머니라고,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다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맺어져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생명의 그늘을 짜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그물의 한 가닥에 불과하다. 그가 그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곧 자신에게 하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을 위해 그대들이 마련해 준 곳으로 가라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는 떨어져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우리가 여생을 어디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패배의 굴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의 전사들은 수치심에 사로잡혔으며 패배한 이후로 헛되이 나날을 보내면서 단 음식과 독한 술로 그들의 육신을 더럽히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나머지 나날을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 많은 날이 남아있지도 않다. 몇 시간, 혹은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가면 언제가 이 땅에 살았거나 숲 속에서 조그맣게 무리를 지어 지금도 살고 있는 위대한 부족의 자식들 중에 그 누구도 살아남아서 한때 그대들만큼이나 힘세고 희망에 넘쳤던 사람들의 무덤을 슬퍼해 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우리 부족의 멸망을 슬퍼해야 하는가? 부족이란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인간들은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는 간다. 자기네 하나님과 친구처럼 함께 걷고 이야기하는 백인들조차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백인들 또한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은 땅을 소유하고 싶어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홍인에게나 백인에게나 꼭같은 것이다. 이 땅은 하느님에게 소중한 것이므로 땅을 헤치는 것은 그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다. 백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져 갈 것이다. 어쩌면 다른 종족보다 더 빨리 사라질지 모른다. 계속해서 그대들의 잠자리를 더럽힌다면 어느 날 밤 그대들은 쓰레기더미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멸망할 때 그대들을 이 땅에 보내주고 어떤 특별한 목적으로 그대들에게 이 땅과 홍인을 지배할 권한을 허락해 준 하느님에 의해 불태워져 환하게 빛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신비이다. 언제 물소들이 모두 살육되고 야생마가 길들여지고 은밀한 숲 구석구석이 수많은 인간들의 냄새로 가득 차고 무르익은 언덕이 말하는 쇠줄 (電話線)로 더럽혀질 것인지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덤불은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독수리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다. 날랜 조랑말과 사냥에 작별을 고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의 끝이자 죽음의 시작이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 심장의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나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출전 '녹색평론선집1'>


땅의 소중함, 들에서 샘솟아 오르는 위대한 생명력, 들안에 가득한 고귀한 정신과 영혼의 소중함을 백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홍인인 인디언 추장의 마음은 피가 끓어 오르듯 애절하면서도 의연합니다. 자연에서 배우는 것, 들판에서 들 정신을 만나게 하는 것, 들 얼로 가득차게 하는 것.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마음이 가득 깃들도록 하는 것이 바로 들공부를 해야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생명 문화를 체득하기 위한 들공부

사랑스런 마음을 간직한 아이 모습은 밝고 환합니다. 그 마음 속에 기쁨이 넘쳐나는 아이 모습은 천사처럼 해맑습니다. 착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는 여유롭습니다. 그 마음에는 용기와 정의감으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어떤 교육을 해야 이런 아이들로 자라나게 할 수 있을까요? 다음은 우리 땅에서 생명문화의 전도사로 일컬어지는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님 글입니다. 녹색평론을 창간하면서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소중한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닥친 문명의 절대 위기를 올바르게 읽어내고 우리 삶을 스스로 추스려 보아 우리 아이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 느끼게 합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영남대 교수)

지금부터 이십 년이나 삼십 년쯤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범람하는 인쇄물의 공해의 시대에 또 하나의 공해를 추방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 조그마한 잡지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무겁다. 거의 파국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산업문명의 이 압도적인 추세 속에서 우리의 보잘것없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게다가 이 작업이 불가피하게 삼림파손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실로 착찹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시도하려는 작업이 어떤 의미가 있든지간에 이것이 생태계의 훼손을 조금이라도 수반하는 것이라면, 이 작업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망설임 끝에 결국 이 잡지를 내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크게 가치 있거나 많은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으리라는 자기도취적인 낙관이 있어서가 아니다. 점점 가속적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환경문제를 보면서,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체들이 지구상에서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불투명해지는 현실에 직면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은 그렇다치고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될지,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사랑을 하고 이번에는 자기 아이들을 가질 차례가 되었을 때 그들의 심증에 망설임이 없을까 하는 좀더 절박한 심정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아마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회피하기 어려운 당면 현실일 것이다. 우리가 <녹색평론>을 구상한 것은 지극히 미미할 정도로나마 우리 자신의 책임감을 표현하고, 거의 비숫한 심정을 느끼고 있는 결코 적지 않을 동시대인들과의 정신적 교류를 희망하면서, 민감한 마음을 지닌 영혼들과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절박한 심정이 지금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심정이 단지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의 예외적인 판단에 기인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다지 상상력이 풍부하지 않은 마음으로도 지금 상황은 인류사에서 유례가 없는 전면적인 위기, 정치나 경제 위기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문화의 위기, 즉 도덕적 철학적 위기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의 삶이 일종의 묵시록적인 상황에 임박해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애써 이것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스스로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안팎의 모든 체험에 비추어 다소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 각자는 저마다 내심 깊은 공포를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환경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지배적인 논의 방식에서 보는 것처럼 이것을 단순한 외부적 재난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 자신의 기본가정 자체의 결함으로 인식하는데 무능력을 드러내고 있는지 모르다. 근원적인 공포가 사태의 정당한 인식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본질적인 결핍을 느끼면서도 환경재난에 대한 기술주의적 접근방법만이 활개를 치고, 또 그러한 현실에 대해 대체로 묵종黙從해 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환경 재난이 제기하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으로부터 자꾸만 도피한다면, 모처럼 이 위기가 인간의 자기쇄신이나 성숙을 위하여 제공하는 진정한 도전에 성실하게 응답하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이 생태학적 재난은 결국 인간이 진보와 발전의 이름 밑에서 이룩해온 이른바 문명, 그 중에서도 특히 서구적 산업문명에 내재한 논리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사회적, 인간적, 자연적 위기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지구상에서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진실로 심오한 철학적 종교적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백여 년간 서양문화로부터의 충격 속에서 거의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근대화 콤플렉스에 깊숙이 젖어온 민족의 처지에서, 하나의 인간공동체로서 번영을 누릴 뿐만 아니라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도 모든 사람의 에너지를 경제 성장과 산업화에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어느 정도는 물질적 성공과 서구적 생활방식의 모방의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으로 기대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다름 아닌 그러한 성공의 대가로 인간생존 터전 자체의 붕괴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은 한국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고통일 것임이 분명하다. 이 시점에서 대다수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못 보고, 적당히 짜깁기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랜 기간 의심할 나위없이 믿어왔던 삶의 목표와 우선 순위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변경할 만한 심리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환상을 갖고 싶어도, 이대로 간다면 머지않아 생존의 자연적 토대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만다는 냉정한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 온갖 곳에서 매순간 끊임없이 불거져 나오는 환경재난과 생명훼손의 사례들은 이 추세에 강력한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나 다음 세대들의 이 지상에서의 생존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들이다. 물론 오랜 옛날부터 예언자들은 흔히 세상의 종말을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예언은 무엇보다도 종교적 열정에 근거를 둔 것임에 반해서 오늘의 묵시록적인 전망은 다분히 과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자들간에는 토양오염이나 온실효과나 오존층 고갈이나 세계의 사막화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한 방법에 대한 기술적 탐색에 골몰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인간 자신이 생물학적 존재조건을 변경시킬 수 없는 한, 어떠한 기술적 재간으로도 생물체로서의 생존조건을 파괴하면서 살아남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는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맑은 공기도, 푸른 하늘도, 숲도, 강물도 없는 세상에서 사람은 살고 싶은 욕망을 느낄 수 있는가?

과학기술이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도 오늘의 크나큰 비극을 가중시키는 주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도 기술공학도 결코 만능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사태의 악화에 훨씬 더 많이 기여해 왔다는 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 각자가 전문적 지식을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품고 있는 맹목적인 숭배나 신뢰는 과학은 거짓이 없고 실패가 없다는 전연 근거 없는 미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미신이 널리 유포된 데에는 이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비역사적 사고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의 진리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잠정적이었고 모색적인 것이었지 결코 항구적인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하게 과학적인 태도는 그러니까 늘 열려있는 겸손한 태도일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현재 능력이나 인식방법으로써 포착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하여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참다운 과학정신과 인연이 먼 태도라 해야 옳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힘이 막강하고, 부분적이나마 과학기술 수준이 찬탄스러운 것이라해도, 과학은 여전히 우리 삶의 바탕과 이 세상과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를 해명하는 데에는 너무나 미약하고 부적절한 수단 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물며, 기계론적 우주관과 선형적 진보사관에 의지하여 전개되어온 지난 수세기의 근대과학기술의 성과는 이제 인류의 파멸까지도 배제하지 않는 지구생태계의 대재난을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온 것이 아닌가? 삶의 태반을 망가뜨리면서 그것을 진보와 발전이라고 믿어온 것은 실로 우매의 극치라 할 만하고, 완전한 미치광이 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관계, 그리고 근대과학의 근본 가정에 깔려 있는 폭력성에 대한 뿌리로부터의 철저한 반성 없이, 계속하여 더 많은 과학과 더 정교한 기술만을 구한다면 파멸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금 닥친 위기가 민족단위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인류사 전체의 경험으로서도 미증유의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그러니만큼 여기에 관한 한 어디에서 빌려올 수 있는 손쉬운 처방이 없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유례없는 위기는 본질적으로 우리 삶의 현상적 측면에 대한 이러저러한 부분적, 임시적, 외면적 수습책으로는 절대로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바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 우리 생활공간에 빚어지고 있는 공해, 오염, 자연파괴 문제는 우리의 일반적인 사회관계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적의와 긴장에 차 있을 뿐더러 우리의 사회상황이 극심한 부패와 윤리적 타락으로 고통 당하고 우리 각자의 내면이 날로 피폐해져 가고 있는 상황에 정확히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그러니까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개인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의 문제와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문제라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정치 경제의 문제이자 동시에 철학과 도덕과 종교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예의 주목하고 그것을 혁파하는 일에 주력해 온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사회사사은 그것이 사람에 의한 사람의 지배, 착취를 반대해 왔다는 점에서 존경받아 마땅한 사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의 관점에 머무르고 있는 한, 특히 자연세계와의 조화가 중심문제로 된 오늘날 그것은 크게 미흡한 사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때때로 인간과 자연의 동시적인 해방에 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맑스주의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을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 제한하여 본다는 점에서 부르조아 철학과 궤를 같이해 왔 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를 수렵채취의 생활양식으로부터 산업적 생활방식에 이르는 직선적인 진화의 흐름으로 파악한다는 관점은 이 지구상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져온 인류생활의 최신의 전개가 반드시 바람직한 생활형태를 기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로 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관점이다. 생산과 소비의 양적 증가는 도리어 인간생활을 비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비극적인 경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바로 오늘의 현실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산업화의 이데올로기에 봉사해 왔다고 할 수 있는 맑스주의에서 인간 속에 뿌리깊이 내재한 정신적 종교적 욕구가 흔히 등한시되어온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영국의 작가 로렌스는 볼셰비키혁명 후 러시아의 민중이 빵을 고르게 먹는 것은 가능해졌으나 그 빵이 맛이 없어졌다고 말함으로써 인간 영혼의 근원적 요구를 외면하는 사상이나 사회운동에 대한 그 자신의 불신을 표명한 바 있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불가결한 차원의 하나가 초월에 대한 욕구라는 것은 아무래도 부인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초월에 대한 욕망은 인간성에 깊이 내재하고 있는 충동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자연이나 우주적 연관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봄으로써 획득되는 정신적 체험을 통해 비로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윤리학에서 삶의 최고형태를 명상하는 삶에서 찾았을 때, 이것은 일반적으로 고대들인이 품고 있었던 조화와 균형․통일의 세계관을 요약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문화에서 흔히 그러했듯이, 사람이 명상할 수 있는 능력은 개인이 자기보다 더 큰 전체, 공동체나 자연이나 우주적 전체 속의 작은 일부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사색할 줄 아는 습관 속에서 길러지는 것일 것이다. 인간은 좁고, 미약하고, 일시적인 자기의 개인적인 삶의 테두리를 늘 보다 큰 지평 속에 관계시킴으로써 영속적인 거대한 우주적 생명활동에 스스로를 참여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고대사회에서나 토착전통사회에서나 혹은 이른바 미개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었다. 현대 산업사회의 핵심적인 비극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인생의 의미를 완전히 몰각해 왔다는 점에 있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삶의 우주적 연관이나 자연적 근거를 완전히 망각한 문화라는 것은 거의 낯선 것이었다고 할 수 있고, 사람의 에너지를 온통 소득과 소비의 경쟁 속에 쏟아 붓도록 강요하는 오늘의 지배적인 산업문화는 인류사에서 극히 예외적인 생존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생태학적 위기로 요약되는 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끔직스럽기도 한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결국 우리들 각자가 자기 개인보다 더 큰 존재를 습관적으로 의식할 수 있게 하는 문화를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러한 문화의 재건은 우리 각자의 인간적인 자기쇄신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음이 분명하다.

따지고 보면, 현대 기술문명의 기저에는 정복적 인간의 교만심이 완강하게 버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도를 따르는 순리의 생활을 우습게 여기면서,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통제와 조종 속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야만적인 폭력이 끝없이 창궐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연적 환경이든 인문적 환경이든 나날이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생활의 창조적 재조직이 가능하려면,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겸손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정신적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출전 : 녹색평론선집1 )


이 글에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삶의 방식에 대해 하나의 교훈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김종철 선생님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윤리학에서 삶의 최고형태를 명상하는 삶에서 찾았을 때, 이것은 일반적으로 고대들인이 품고 있었던 조화와 균형․통일의 세계관을 요약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문화에서 흔히 그러했듯이, 사람이 명상할 수 있는 능력은 개인이 자기보다 더 큰 전체, 공동체나 자연이나 우주적 전체 속의 작은 일부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고 사색할 줄 아는 습관 속에서 길러지는 것일 것이다. 인간은 좁고, 미약하고, 일시적인 자기의 개인적인 삶의 테두리를 늘 보다 큰 지평 속에 관계시킴으로써 영속적인 거대한 우주적 생명활동에 스스로를 참여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고대사회에서나 토착전통사회에서나 혹은 이른바 미개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었다. 현대 산업사회의 핵심적인 비극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인생의 의미를 완전히 몰각해 왔다는 점에 있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삶의 우주적 연관이나 자연적 근거를 완전히 망각한 문화라는 것은 거의 낯선 것이었다고 할 수 있고, 사람의 에너지를 온통 소득과 소비의 경쟁 속에 쏟아 붓도록 강요하는 오늘의 지배적인 산업문화는 인류사에서 극히 예외적인 생존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 고 정리한 것처럼 우리는 삶과 교육의 알맹이가 되는 자연과 교감하는 일을 너무나 소홀히 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맹목적인 욕망의 추구를 우리들 삶의 전부로 인식하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아이들과 들공부를 해야하는 두 번째 이유는 아이들 스스로 자연과 관계를 맺어가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곧 우주적 생명활동 속에서 우리 삶이 지속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자연에 가득한 생명들을 하나씩 관찰하고 그 생명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되었을 때 교육과 삶은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들공부

들공부는 서로를 살리는 교육입니다. 즉 상생相生과 공생共生 교육입니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다른 생명체들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과 다른 생명체에 의해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서로를 살리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게 하는 삶을 가르치는 것이 들공부이며 교육입니다.

인간은 광합성을 하여 스스로 영양분을 생산하지 못하므로 식물을 섭취하거나 식물을 섭취한 다른 동물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먹이 사슬의 가장 높은 단계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살지 못하여 숲이 사라지면 우리 사람들도 죽게 되는 것은 자연순환의 이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무를 함부로 베거나 숲을 마구 없애 버립니다. 지구환경을 걱정하는 지식인 모임인 「로마클럽」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 인류는 지금 매일 하루동안에 20만 에이커가 넘는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있고, 1천3백만 톤의 유독성 화학 물질을 방출하고 있으며, 매일 4만5천명이 굶어 죽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동안에 약130여종의 동식물이 멸종되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 부자나라에 수출할 소를 기르기 위해 가난한 나라에서는 숲을 없애고 그 곳에 소를 키우거나 소가 먹을 사료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낙원으로 불리웠던 소말리아의 울창한 열대림은 프랑스와 유럽인들이 소비할 소고기 생산을 위해 모두 파괴되어 지금은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황폐화되었습니다. 소말리아의 울창한 숲은 태워지거나 베어져 그 곳에 소를 기르거나 소가 먹을 옥수수를 키웠고, 소말리아 국민들은 기아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5년 사이 소말리아 인구가 25%나 줄어들었다는 유엔의 보고는 이러한 사실이 가난한 나라에 흔히 발생하는 일이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이러한 시대적 인식 바탕위에서 우리는 우리 아이들 교육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대구에서 대안교육의 정신을 실천하고 계시는 「배움의 숲」 김희동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서로를 살리는 교육에 대해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로를 살리는 교육 /김희동 (배움의 숲 대표)

지금의 제도에서 교육을 많이 받으면 어떤 사람이 될까? 자신의 영역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무능력한 실업자가 될 뿐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영역에서나마 참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돕는가? 우리의 교육이? 삶의 의미, 자신의 참모습, 진리를 깨우치고 발견하게 돕는가?

삶의 목적은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자신의 참된 모습. 이 세상에 내려와 죽는 날까지 실현코자 하는 그 무엇. 배우고 깨우치며 더 나아가야 할 그 무엇. 그 참된 모습을 찾고 실현할 수 있게 돕는 것이 교육이 아니라면 교육은 뭐 하자고 하는 걸까? 진학 도구? 돈벌이 수단? 행복보장의 신호? 그런 것이 정말 교육이 할 일일까?

나는 이 지구상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대부분의 교육이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교육과는 거리가 멀게 떨어져 나와, 보다 더 나은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게 목적의 전부가 된 채 교육개혁이란 마차에 매달려 끌려다니고 있는 중이라고 본다. 진리 추구를 빠뜨린 채 개성의 실현에만 매달리는 지금의 세계 교육개혁은 분명 새로운 직종을 창출하고 보다 폭넓은 문화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지는 모르나, 참되게 살고자하는 열망과 진리를 위한 자발적인 헌신 따위는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나이가 들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욱 훌륭한 인격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더욱 반항적이 되어가고 학교를 역겨워하고 날마다 스트레스 타령이나 하며 분출구를 찾아 그토록 헤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학교가 아이들을 위해 있는 곳이 아니며, 교육이 진정으로 참된 삶을 찾는 데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음을 한번에 알아볼 수 있는 증거다. 아이들 들먹일 것 없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교육이라 하면 무슨 인상이 떠오르는지. 그것은 곧 억압과 빼앗김, 억지로 해야할 무엇, 거부하면 불량품으로 낙인 찍히고마는 무시무시한 것….

그런 학교를 개혁한다고는 하지만 불안하고 미심쩍다. 바른 방향으로 잘 나아가기를 바라지만 지금의 교육개혁가들 가운데 참된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번도 보질 못했으니 걱정이 앞선다. 닫힌 교문이 열려 지역사회가 참여하고 대학입시가 덜 위협적이도록 하는 데서 더 나아가야 하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효율성에 매달리고 학력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국가경쟁력을 노래하고 있다. 21세기형 인간, 수요자중심, 다품종소량생산이란 말을 쓰지 않으면 교육을 얘기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니 어떻게 참다운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런 말을 꺼내면 비웃음만 살 뿐이다. 아, 어디서부터 교육을 새롭게 세워나가야 하나….

몸을 보라. 나는 교육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몸의 관찰에서 얻었다. 몸을 차분히 바라보면 숨과 먹이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숨은 들어오고 나감의 끝없는 되풀이다. 새로움을 들이쉬고 낡은 것을 내쉰다. 먹이는 나 아닌 것을 받아들이고 나의 것을 내놓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성장한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으며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이 몸을 중심으로 나와 나 아닌 것의 관계를 맺는다. 내가 몸에서 벗어나면 숨이나 먹이는 의미가 없다. 나 아닌 것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면 숨도 먹이도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몸이 없어지면 삶을 통해 배울 기회도 함께 없어진다. 이렇듯 나는 이 몸을 매개로 나 아닌 것들과 뗄 수 없고 끊임없는 관계가 맺어져 삶을 이어가고 있다. 결국 나와 나 아닌 것이 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으며 이 우주만물에서 나 아닌 것은 없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듯 서로가 둘(나와 나 아닌 것)이 아니라 하나였으므로 본질에서는 뗄 수가 없지만, 일상의 삶에서는 분명히 둘로 나뉘어 있다. 나뉘어져 있을 뿐 아니라 분명한 자기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구실, 역할, 입장, 처지 같은 것이 저마다 다 있는 것이다. 만물은 다 자기 모습과 그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물은 물로서, 꽃은 꽃으로서 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순수할수록 더욱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활발히 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 정체성이 뚜렷할수록 진정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연필은 그 자신이 연필의 속성을 뚜렷이 지니고 있기에 종이와 지우개와 문구사와 공부와 다 관계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이것은 사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저마다 독특함을 지니고 있는데, 그 독특함을 통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실현하고 한다. 믿든 안 믿든 우리 모두는 영원한 존재에서 떨어져 내려와 자신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 삶을 체험하려는 존재이며 바로 그런 까닭에 이 독특함이 생겨나는 것이다. 흔히 알려진 식으로 유전이나 환경요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내려오기 전에 자신이 특별히 기획한 삶의 줄거리에 맞게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이 독특함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밋밋한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계획을 망치려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독특함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는 일! 얼마나 흥미롭고 신나는 일인가!

그런데 이 독특함은 제 스스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한 이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이 관계가 참답게 형성될 때 서로를 살리는 일이 일어난다. 서로를 존중하며 자신에게 충실한 관계, 이 관계를 통하여 서로가 서로의 거짓되고 못된 습성을 버리고 참되고 올바른 삶을 추구하게 된다. 상생의 교육이 되는 것이다.


민들레처럼 들살이하기

서로를 살리는 교육은 저마다의 독특함이 인정되고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합니다. 들판에 핀 꽃, 길 가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돌멩이 하나라도 다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그런 독특함으로 우리 세상은 조화를 이루고 아름다워 집니다. 아이들에게 들공부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가 어던 독특함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들과 무생명체들이 각기 고유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인정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무시하거나 없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다름으로 인해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진리를 깨닫는다면 자신의 존재만큼이나 다른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삶을 가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논술교육의 일환으로 들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논술교육의 중심에 들공부를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논술 교육이 아이들의 삶을 스스로 가꾸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자연환경을 관념으로 대하는 것을 탈피하게 하려면 아이들을 들판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풀 하나 꽃 한송이에 담긴 우주의 생명력을 내 것으로 교감하는 일이 환경문제를 공부한답시고 오염현상을 달달달 외우는 것보다는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자연에서 자란 아이는 자연을 닮고 인공적인 환경과 기계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기계의 차가움을 닮아갑니다. 일회적이고 형식적인 들공부를 흉내내는 것에서 벗어나 지속적이고 계획적인 들공부를 시도할 때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안내자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들의 생명력을 알려주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논술 교육의 의미를 다음 시에서 찾아보기를 권하며 들공부에 대한 생각을 접습니다.


민들레의 뿌리 / 도종환


날이 가물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때가 되면 햇살 가득 넘치고 빗물 넉넉해

꽃 피고 열매 맺는 일 순탄하기만 한 삶도 많지만

사는 일 누구에게나 그리 만만치 않아

어느 해엔 늦도록 추위가 물러가지 않거나

가뭄이 깊어 튼실한 꽃은커녕

몸을 지키기 어려운 때도 있다

눈치 빠른 이들은 들판을 떠나고

남아 있는 것들도 삶의 반경을 절반으로 줄이며

떨어져나가는 제 살과 이파리들

어쩌지 못하고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다

겉보기엔 많이 빈약해지고 초췌하여 지쳐 있는 듯하지만

그럴수록 민들레는 뿌리를 깊이 내린다

남들은 제 꽃이 어떤 모양 어떤 빛깔로 비칠까 걱정할 때

겉뿌리 다 데리고 원뿌리를 곧게 곧게 아래로 내린다

꽃 피기 어려운 때일수록 두 배 세 배 깊어져간다

더욱 말없이 더욱 진지하게 낮은 곳을 찾아서




노작교육 / 발드로프 교육(Waldorf-Padagogik)과 '손 놀림' 노작 교육  / 최유현


1919년 독일의 슈트르가르트에서 처음으로 발드로프 학교가 설립된 이후 지금은 세계적으로 그 학교의 수가 늘어나 50개국에서 이름은 달리하지만 발드로프 형태의 학교가 존재하고 있다. 이는 거의 80년 동안 실험적 수준을 넘어서 많은 교육학자들에게도 관심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발드로프의 형태를 갖춘 학교는 없다. 그러나 최근에 발드로프 교육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이를 연구하는 한국 슈타이너 교육예술협회가 1995년에 창립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

1919년에 시작된 발드로프 교육이 오늘 우리에게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인지학(anthroposophy)에 기초한 루돌프 슈타이너의 교육론이 정신과 영혼을 배제한 지적 교육의 한계를 들어내고 있는 기존의 교육의 대안으로서의 역할이 더욱 증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간의 교육은 인간의 본질적인 전존재론적 인간의 접근 없이는 궁극적인 해결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심리학과 교육이론이 제시되었지만 궁극적인 문제해결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열린교육이 잘 적용되는 경우는 열린교육을 하는 주체가 아동을 열린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 볼 때 성공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 정신적인 접근은 사람의 교육에 있어서는 분명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슈타이너의 교육학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고(thinking), 감정(feeling), 실천(doing)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는 주지주의적 기존 교육관에 대한 도전일 뿐만아니라, 현대의 비인간적 교육에 새로운 대안이었다(전일균, 1996, p.44). 루돌프 슈타이너의 교육 사상에 의해 세계적인 발드로프 교육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신체(body), 정신(spirit), 영혼(soul)이 전인간적인 존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교육 이론과 방법이 인간 본연의 모습을 간과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체험과 정신성에 바탕을 발드로프 교육이 기존의 교육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슈타이너 교육사상에 기초한 여러 발드로프 학교는 다소의 차이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슈타이너의 교육 철학은 그 학교의 교육 철학으로 자리잡고 있다. 슈타이너가 주장한 육체, 영혼, 정신과의 관계 속에서 물질적 세계에서 정신적 세계로 이끄는 교육적 활동에서 노작 활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이러한 발드르프 교육, 슈타이너 교육에서의 중핵적인 영역 중 하나가 손놀림 노작교육에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슈타이너의 교육관을 이해하면 왜 그러한 접근이 불가피한가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작이 육체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정신성의 교육으로 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슈타이너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를 통하여 감각적으로 인지되고 있는 사물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아동들에게 있어서 가장 깨어 있는 부분이 바로 손과 발이며, 이를 통하여 외적세계의 사물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을 일깨우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이라는 외부세계는 이해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살아있는 경험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Childs, 1991, 전일균, 1996, p.47).

그는 단지 머리로만 아는 지식(head-knowledge)은 인간의 존재와 본성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얻게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인류가 쌓아 놓은 모든 문명은 인간의 노동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에, 머리만이 아닌 노작활동을 통해서만 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슈타이너는 이 세상에 모든 물질들은 신의 창조물이므로, 인간은 수공을 통하여 비로소 세계와 대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 물질들은 현명하게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정신세계의 일면을 획득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Richards, 1980, 전일균, 1996, p.47).

따라서 슈타이너 교육학에서는 노작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는 인류문명을 이해하려는 차원에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영혼과 정신세계를 획득해 가는 방법적 원리로서 노작교육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전일균, 1996, p.48). 슈타이너는 이러한 현실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노작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Steiner, 1972, 전일균, 1996, p.28).

발드로프 학교의 교육목표는 인간 존재로서의 노작에 대한 창조적 학습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아동들은 교실에서 인간의 다양한 삶에 대하여 사고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동들에게 올바른 삶을 구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노작활동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학교생활 속에서 삶의 핵심적인 요소들은 물론이고 실제적인 활동조차도 배우지 못하였거나, 혹은 배웠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시기에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결국영혼의 총체적인 발달에 상처를 입히게 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극히 초보적인 기계적 원리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기차를 타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이와 같이 인간에 의하여 창조된 사회적 산물들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비사회적 삶의 시작일 것이다. 교육은 결국 아동들에게 인간의 창조력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제공하여 아동들이 사회적 삶 속에서 올바른 자신의 위치를 찾고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슈타이너에 있어서 노작교육은 단순한 기능 학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다양한 측면과 친숙해지는데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들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도구 사용을 위한 손놀림이 필요하며, 어려서부터 이를 통한 노작 활동이 전개되었을 때 기술적인 능력의 확보는 물론이고, 정신능력의 계발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슈타이너는 이러한 노작활동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육체․영혼․정신을 일치시켜 주는 존재로서의 전인, 그리고 내면의 세계와 외면의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통합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위하여 꼭 필요한 활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노작교육 속에서 자연과 유리되지 않은, 그리고 영혼과 정신이 함께 하는 인간을 발견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물질주의가 지니고 있는 편파적 교육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교육은 결코 외부 세계의 기능들에 적응해 가는 법칙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동들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느끼도록'하는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지혜를 전달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Steiner, 1982, 전일균, 1996, p.49).

이와 같은 슈타이너의 노작 교육은 실제로 발드로르프 교육에서 다음과 같이 반영되고 있다(염영희․이연현(역), 1996. p.36).


어느 날 담임교사가 후미양의 농업 노작 활동을 수업을 보고 후미양에게 말했다.

"후미는 일하고 있지 않군"

하고 말했다. 그녀는 분명히 갈퀴를 손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솔바이가 분개해서는

"후미는 일하고 있어요. 선생님 안보이세요?"

하며 항의했다.

"아니 내가 하는 말은 후미의 마음 말이야. 그녀의 속이 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야"하며 돌아갔다.


이 수업에서 후미가 일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은 '후미의 안쪽'이 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며, 손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발드로프 교육에서의 노작은 보이는 신체 활동보다 보이지 않는 정신적 활동에 그 의미를 크게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발드로프 교육에서의 노작활동은 아동들에게 '세계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느끼도록'하는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지혜를 전달해 주고자 한다.

발드로프 교육에서의 손놀림 노작활동은 루돌프 슈타이너의 노작교육론에 기초하고 있다. 슈타이너의 노작교육론은 그가 추구하고 있는 교육론을 현실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실제로 발드로프 학교에서는 체험과 환경에 기초한 노작 활동을 아동들에게 부과하고 있다. 발드로프 교육이 갖는 몇 가지 노작교육의 교육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발드로프 교육의 노작교육은 전인성(全人性)에 바탕을 둔다.

노작활동은 단순한 육체적 활동이 아니라 정신적 깨우침의 과정이 된다. '사고는 질서 정연한 뜨개질 같다'라는 슈타이너의 말처럼 진정한 사고는 모든 생각과 행동의 발달을 이루는 삶의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Richards, 1980). 특히 예술과 실제적 노작활동(practical skills)에서는 발드로프 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전인적 인간(머리; Head, 마음; Heart, 손; Hand)은 실제로 교육되어질 수 있다(Barns, 1998).

둘째, 발드로프 교육의 노작 활동은 정신적 사고와 창조적 행위를 추구한다.

발드로프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은 육체, 마음, 그리고 정신의 건강한 형성에 있다. 이미 칸트가 말한 바와 같이 손은 밖으로 나온 인간의 뇌와 같다. 발드로프 학교들은 유치원과 저학년에서는 손가락 놀림에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다. 이는 음악, 미술 등의 수업에서도 이루어지지만 수공 수업을 통하여 뜨개질, 바느질을 통하여 손놀림을 시작한다. 이 때에 만들어진 물건들은 실생활에서 쓸 수 있어야 한다. 보기로 책상 닦게, 남방셔츠, 신발 등이다. 모든 것은 쓸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예술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발드로프 학교에서는 1919년 이래로 능숙한 손가락 놀림을 통하여 습득하고 그것은 아이의 생각에 늘 활기 있게 만들고 있다(Baudendistel, 1995).

이와 같이 손놀림 노작의 행위는 학생들의 사고에 생기를 주고, 그들의 손에 의하여 산출되는 작품은 실용적 가치에서 예술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예술성은 스스로의 생각과 표현에 기초하며 단순한 신체적인 모방 활동이 아니라 창조적인 활동임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손놀림 노작교육은 발드로프 교육에 있어서 신체와 정신을 통합하는 활동이다.

노작교육은 신체적 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고와 정신적 활동의 하나이다. 이것이 손(hand), 머리(head), 가슴(heart)으로 이어지는 교육을 추구할 때 노작교육은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발드로프 학교에서는 믿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물을 대할 때 그것이 순전히 분석적인 방법으로 머리로만 써서 얻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배움은 구체적인 행동으로부터 얻게되는 "실제적인 배움"이다. "손, 머리, 가슴"을 쓰는 실제적인 배움은 자신 스스로 작업을 함으로써 얻게되는 체험과 실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학교 실습활동에서 소개되고 실천되는 노작교육은 성장기 어린이들의 사고와 행동발달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손작업과 기계작업에 대한 능력을 갖게 한다(Charles, 1995).

한편 전일균(1996)은 슈타이너 노작교육론의 중요한 원리로서 통합성의 원리를 내세우고 있다. 즉 노작활동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 세계와 사물이 존재하는 외부세계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노작교육의 원리는 인간이 우주와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해 왔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즉 노작활동은 '작은 항아리가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예술품이면서, 한편으로는 곡식을 담는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줌으로써 삶의 총체적인 직관력을 갖게 한다(Richards, 1980).

넷째, 발드로프 교육에서의 손놀림 노작교육은 실생활과 밀접히 관련을 맺는다.

슈타이너 교육론은 신비적이며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실생활과 밀접한 관련한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슈타이너의 교육론은 현실 세계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세계에서 보여지고 있는 모습이외의 또 다른 면을 이해함으로써 현실 세계에 더욱 잘 적응하고 의미 있게 삶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아동들은 노작활동을 통하여 정신작용의 형상화를 얻게 되며, 아울러 성인이 되어 갖게될 직업 활동에 대해서도 다양한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연스러운 노작활동 속에서 아동들은 삶의 전체적인 모습을 이해하게 되고, 사회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 타인들에 대해서도 폭을 넓혀 나가게 된다(Steiner, 1972).

이러한 슈타이너의 주장은 노작 활동이 생활 속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아동에게 제공해야 되고 그것이 실생활과 밀접히 관련되고 나아가 미래에 얻게될 직업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울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다섯째, 발드로프 교육의 손놀림 노작교육은 발달단계에 따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른 교과와도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발드로프 교육에서 교육과정에서는 앎은 점점 심화된 나선형 교육과정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수직적 통합(vertical integration)과 수평적 통합(horizontal integration)을 발달단계에서 고려한다. 특히 예술과 노작 활동에서 발달단계를 고려한 학년간의 위계는 대단히 중요하다(Barnes, 1998).

이상에서 제시한 슈타이너 노작교육에 기초한 발드로프 교육에 있어서 손놀림 노작교육의 교육적 의미는 궁극적으로 한 가지 이념에서 통합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이는 슈타이너가 기본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노작교육의 본질인 '손으로 느끼는 전인적 교육' 일 가능성이 높다. (이 글은 최유현의 '발드로프 교육에서의 손놀림 노작교육의 교육적 의미' 연구(홀리스틱연구, 1998)에서 발췌하였음.


※  다음 자료는 어린이 지도를 하시는 교사들이 꼭 읽어 보아야 할 필독서 입니다.

루르 루돌프 슈타이너 학교 / 김용한 옮김 / 밝은 누리

루돌프 슈타이너 교육론 / 윌킨슨 로이 / 내일을 여는 책

발도로프 학교의 감성교육 / 고야스 미치코 / 밝은 누리

발도로프 학교의 참교육 이야기 /고야스 미치코/ 밝은 누리

노래하는 나무 /한주미 /민들레

초감각적 세계인식 / 슈타이너 / 물병자리

색채의 본질 / 슈타이너 / 물병자리

  인지 심리 /변창진,송명자 외/교육과학사

  내 안에 접혀진 날개 / 리처드 로어,안드레아스 에베르트지음, 이화숙 옮김 / 열린출판

  사람을 알 수 있는 아홉가지 방법/ R.배론, L 와겔리 지음, 최연실 옮김/청림출판 

  나의 모습 나의 얼굴/한국심리검사연구소

  카오스의 아이들/더글러스 러시코프/민음사

  어린이들의 학습에 비계 설정-비고스키와 유아교육/홍용희 역/창지사

 

 

 

 

                           주제체험학습으로서의 독서논술활동


지난 95년부터 비젼2002 프로젝트에 따라 학교에서 열린수업을 지향하면서 통합교과수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통합교과수업이란 하나의 주제를 두고 그 주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교과가 통합되어 그 주제를 수행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교과간의 유기적 통합에 따라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표현하게 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또한 주제를 어떻게 수행하느냐의 과정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수행평가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제들은 해오름이 그동안 꾸준하게 지향해 왔던 논술수업 방법론이 학교에서조차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시장’을 주제로 놓고 주제체험수업을 한다고 하였을 때, 시장의 개념-시장의 종류-시장에 있는 다양한 상품-시장에 물건을 제공하는 공장-생산지에서 시장으로 물건을 옮겨주는 유통망-시장에서 다른 시장으로 다시 물건을 분배하는 중간도매상-일반 소비자에게 상품이 건네지는 최종 과정 등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또한 물건을 잘팔기 위해 언론매체를 통해 광고를 하고-광고인을 양성하는 또 다른 학원이나 관련단체가 있고-광고를 제작하는 제작공장이 있으며-광고에 자신의 얼굴이나 몸을 빌려주는 광고인이 있으며-상품을 잘 보이기 위해 포장하는 디자인 영역이 있고- 광고의 역사와- 상품의 역사- 그것 모두를 운영하는 자본주의체제가 있고-상품을 만드는데 종사하는 다양한 기획자와 그런 사람들을 모아 회사를 만들어 운영하는 기업이 존재하고, 물건을 다른 나라에 팔기위해 관계하는 매우 다양한 사회 구조가 존재하는 것을 배우려면 ‘정치’ ,‘경제’, ‘사회’,‘문화’, ‘역사’, ‘철학’, ‘종교’, ‘예술’ 등 또 더없이 다양한 정보와 지식체계를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논술수업에서 통합적으로 다루어 왔기 때문에 ‘수행평가제’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논술 수업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학교에서도 좀 더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제체험학습으로서 독서논술활동

그간 독서지도는 내용 확인, 글 구조 익히기, 서술방식 알기, 인물의 성격 미루어 알기, 글 내용의 적절성, 어휘의 바른 뜻알기 등 사실-추론-비판-논리-어휘 영역에 국한되어 왔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제대로 읽었나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술이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이젠 학교에서조차 그 비중이 확대되면서 그간 진행되어 온 독서활동이 논술이라는 영역으로 결합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글쓰기가 생각을 키우는 힘으로 작용하다가 또한 논술이라는 통합적 영역에 결합되어 이젠 학습활동 자체가 논술로 통합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논술이란 결국 논리적인 서술양식으로부터 시작하여 통합적 교과와 통합적 사고를 지향하게 됨으로써 그 부분적 기능이 전체적 기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더구나 ‘주제체험학습’이 학교 안 수업에서 중심 활동으로 자리잡게 되어 학교 밖에서도 ‘주제체험학습’이란 생소한 학습활동이 요구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주제체험학습’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우리가 그동안 해 온 통합적 성격의 논술수업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자 하는 독서논술도 결국은 통합적인 성격을 안게 되고, 종합적인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매우 복잡(複雜)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과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결국 복잡한 문제를 단순(單純)화 시킨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複雜을 풀어 해석하면 ‘複하면 雜하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섞여 있으면 아무래도 어지럽고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 雜스럽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單純을 풀어보면 ‘單하면 純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單’은 간단하다, 명괘하다, 깨끗하다, 맑다, 순수하다의 뜻이 있는데, ‘純’은 순수하다, 보인다. 착하다. 어질다 등으로 풀어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複하고 雜한 것을 單하고 純한 것으로 풀어가는 것이 곧 문제 해결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마니선생의 개똥철학이 들어간 것이어서 꼭 믿지는 마십시오. 그런데 坐禪을 할 때 禪이라는 말을 씁니다. ‘坐’는 ‘앉다’입니다. 원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가라앉힌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것이겠지요. 온갖 복잡다단한 것을 가라앉혀야 ‘禪’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禪’을 볼까요? 禪은 示 +單이 만나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示’는 ‘본다’.‘의지를 가지고 보다’는 적극적인 개념입니다. 示威라는 말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펼쳐보이고자 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본다’고 할 때 흔히 ‘見’을 쓰지만 ‘見本’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다’라는 수동적인 뜻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視線이나 視膳에서는 示와 見이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말을 정리하자면 단순하게 바로보는 것이 곧 禪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에게 내 생각을 전달할 때 복잡하게 하는 것보다는 단순․명쾌하게 하는 것이 상대방을 이해시키거나 설득시키는 좋은 방법입니다. 한 시간동안 강의를 들었는데 그 강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강의 내용이 무척 어려웠다거나 아니면 청자의 독해 수준이 너무 낮아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모든 것을 가라앉히고 단순한 경지에 이르름을 우리는 선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으로 깨닫게 됩니다. 명상을 하게 되면 모든 잡스럽고 어지러운 것들이 하나씩 정리되어 명쾌해져서 앞이 훤하게 보이게 됩니다. 아항, 이 사건은 이런 것들이 얽혀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구나에 도달하게 됩니다. 따라서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는 자기 능력이야말로 문제를 풀어가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책을 읽었습니다. 교사는 독해를 요구합니다. 책 속에는 매우 복잡한 내용들이 꽉 차있습니다. 독해력이 있는 아이들은 금방 이 책 속에 들어있는 알맹이들을 알아차립니다. “누가 어떻게 해서 이런 문제가 생겼고 그 문제는 이렇게 해서 풀리게 되었는데 누구누구의 역할이 이러저러했다. 따라서 이 글 속에 담긴 주제는 이런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하게 됩니다. 교사는 그런 아이들을 훌륭한 아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책을 몇번이나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내용이 무엇인지 잘모르는 아이들은 독해력이 떨어지는 아이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 아이들이 그런 아이들입니다. 왜 독해력이 없을까요? 쉽게 말하자면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자기 안에 쌓여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아이들에게 독해력을 키워주기 위해 독서논술이라는 학습활동을 하게 됩니다.


초등 저학년 독서활동 목표


그러나 초등 저학년들은 아직 언어기호에 대한 자기체계를 인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글 해독력이 매우 떨어집니다. 초등 1~2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문장들은 1-1/14개- 1-2/23개- 2-1/33개- 2-2/45개로 점점 많아지지만 아직 50 문장 이하로 이루어진 글을 읽게 됩니다. 오히려 문장으로 이루어진 줄글보다는 그림으로 이루어진 언어기호에 더 빠른 적응력을 보이는 나이입니다. 어린이 발달심리학에 따르면 영구치가 모두 나는 10세 이후에라야 자기 언어 체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처해 있는 어린이들에게 독서 활동은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그림책을 많이 활용하게 하는 것이 더 좋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재미마주를 비롯하여 길벗 어린이, 웅진, 보리, 보림 출판사 등에서 초등 저학년을 대상으로 만든 좋은 그림책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영국 초등 저학년들이 꼭 읽는 책 중에 ‘매직 스쿨버스’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생긴 여선생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몸 속 여행을 하면서 우리 몸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인데, 이 시기 아이들에게 적합한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전 출간 된 ‘내 짝꿍 최영대/재미마주’ 나 ‘까마귀 소년/비룡소’는 저학년들에게 짝꿍 문제를 곰곰하게 생각해 보게 하는 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독서․논술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이끌어 내고자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아이들이 어떤 텍스트를 읽더라도 그 뜻을 알고 자기 스스로가 그 내용에 대해 남에게 밝혀 보일 수 있게 하는 능력을 키워주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아이가 자기를 바라볼 수 있고, 사회를 해석해 낼 수 있다면 더 바랄나위가 없겠지요.

이 프로그램은 교과서를 중심에 두고 관련 자료를 섭렵하여 주제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어떤 주제를 강조하고 있는지, 언어영역에서는 주로 어떤 기능을 중요시 하고 있는지 표를 통해 분석하여, 사고력과 연결할 수 있도록 정리하였습니다. 그럼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들어가서 함께 살펴 보도록 하시지요. (이어지는 내용은 마니선생의 초등독서논술 특강 자료집 참조)

 

3학년 시기에 할만한 통합적 독서 논술 활동에 대해


우리 나라 학제로 따르면 3학년 어린이들은 대체로 열 살 먹은 소년기이다. 뼈 근육이 성장 속도를 내어 몸이 불쑥 불쑥 커 가고, 유치를 영구치로 거의 모두 교환하게 되어 얼굴이 나름대로의 골격을 가지게 된다.

또래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소집단을 이루게 되며, 가족 품보다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림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시기이다. 아동 발달 심리학에서는 사회성이 점차 고조되어 동화세계보다는 실제 세계에 대한 적응기라고 보기도 한다. 따라서 자기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는 의지와 함께 자기 세계를 지키려고 하는 방어력도 가지게 된다. 사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시기이며 수학에서는 세자리 이상의 연산과 간단한 도형을 다루게 된다.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단면을 형상화 하는데에서 발전하여 입체화 하는 능력도 가지게 되는 데 사물을 단편적으로만 인식하게 하지 말고 종합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미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려고 하여 문화적으로는 애창곡을 서너 곡 간직하게 되고 누군가를 마음 속에 두고 애정 표현을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또한 양심적인 아이일수록 어른들의 삶에 대해 직선적인 저항을 하기도 하고 좌절에 대한 자기 의식도 갖는다. 그래서 이 시기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자기만의 세상을 꿈꾸고 실행하려는 태도를 보여 엄마들이 당황스러워 하거나 섭섭해 하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발도로프 학교에서는 인지학 발달 과정에 따라 아이들에게 세밀한 선을 사용하게 하는 것과 복잡한 뜨개질 노작 수업도 병행하며, 특히 농사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는 년령이기도 하다. 특히 동화를 들려주거나 역사적인 사건을 들려주고 난 후 생각난 것을 그림으로 완성하게 하는 수업도 중요시 하는 단계이다.

아돌프 슈타이너 박사는 문․무․예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시작되는 나이로 본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몸 쓰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몸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하게 하고 손의 쓰임을 중심으로 자신의 재능과 적성을 발견하게 하고 성숙시키려는 출발단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세계를 간직하게 하려는 노력을 집중적으로 프로그램화하여 이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기 전에 아름다움 품성과 발현을 스스로 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7-8세때 아이들 기질에 따라 모둠을 구성하였다가 이 시기에 오면 각각 다른 기질의 아이들끼리 모둠을 재구성하는데, 점차 자기 기질 중 단점으로 느끼고 있는 것을 장점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을 시작하는 시기라고 판단을 하는 것 같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신과 정 반대의 기질을 가진 아이들과 다시 또래 집단을 형성하기도 한다.

제1의 사춘기를 맞이하는 시기의 아이들에게 어떤 독서 활동을 하게 하려는 것이 좋을까?  온갖 멋을 부리고 싶어하고, 안에서 활동하기 보다는 밖으로 나가려는 경향성을 보이는 아이들,. 기성세대의 모순을 발견하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저항하거나 부정하려는 태도를 가지는 시기, 자기 세계를 하나씩 간직하려는 모습을 가진 아이들을 우리는 만난다.

우리는 이 시기 아이들에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나게 하고 품게 하는 일이 먼저일 것이다. 남을 도우고 남을 위해 기도할 줄 아는 아이로 가꾸어 가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본다. 따라서 독서 활동도 이와 관련된 관점으로 접근해 보는 것이 바람직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4학년 독서 논술 수업 계획하기


초등학교에서는 4학년부터 고학년이라고 확실하게 구분한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교과 내용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복잡해 진다. 읽기 교과서에는 줄글이 부쩍 많아지고 문장 수도 보통 50개를 넘어선다.

4학년 국어 교과서 내용을 살펴보면 3학년 때와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구체적으로 하기 위해 어른과 이웃, 친구에 대한 생활예절을 무척 강조하고 있다거나, 아이 둘레에 있는 사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직업, 공공기관, 우리 문화와 민속놀이, 과학과 환경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추리력을 기르기 위한 교과과정이 많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어질 내용 상상하기, 극본으로 만들어 이야기 하기, 사건 전개 과정 추리하기, 책 속의 내용 상상하기 등이 단원마다 배치되어 있다. 또한 글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기, 제목 붙이기, 새로운 글쓰기 등 독해력과 창의력을 요구하는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생각하는 범위도 꽤 확장되어 있는데, 뜻을 세워 삶의 목표 정하기, 행동이나 사건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기 등이 나온다.

따라서 이 시기에 아이들에게는 어떤 독서 논술활동이 적절할 것인가를 유추해 보면, 어떤 상황을 가정하거나 전제하여 상상하게 한 후 현실 문제로 결합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학습과정에서는 우리 시대에 쟁점이 될 수 있거나 생활속에서 일어나는 딜렘마를 옛 글을 텍스트로하여 판단하게 하는 방식이 효과적일 것이다.

지난 번 3학년 강의 때, 영역 별 주제를 통해 다양한 문제를 다루었듯이 4학년에서는 좀 더 세부적이고 깊이있는 주제를 선택하여 폭 넓게 다룰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음을 참고하여 생각해 보자


6학년 독서논술 수업


우리 나라 6학년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제도교육에서 강조하고 있는 점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지만 그 중심에는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사까지 통사적으로 접근하는 한국사가 있다. 대충 훓고 넘어가는 식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특히 시대별 문화특성과 왕조의 업적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국어교과에는 사고력 중심의 읽을 거리와 생각거리가 많이 나오고, 수학은 마방진을 열심히 하고 있는 마니선생이 손도 못댈 만큼 어려운 단원으로 수북하다. 음악과 미술은 동서양을 마구 뒤섞어 놓아 애매함 때문에 그 맛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짬뽕 같다.

한국인으로서의 삶도, 세계인으로서의 적격한 지식도, 어린이로서의 순수함과 아름다움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상급학교 진학에 대비하는 듯한 마구잡이식 혼합형 교과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 아이들은 초등학교 최고학년으로서 의젓함과 성숙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특히 사회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미 이 시기의 많은 어린이들이 고정관념에 깊이 물들어 있거나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그대로 답습하여 관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흔한 것 같다.

멋을 부릴 줄 아는 나이가 되었고 무서운 십대의 기수로서 한 명성을 날리기에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나이이다. 많은 아이들은 입에 랩을 달고 다니며, 귀에는 이어폰을 깊숙하게 꽂아 타인과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면밀함도 있다. 소비성향이 극대화되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고, 텔레비전 오락 프로를 독점하는 향락성도 과욕을 부릴 만큼 왕성하다.

성에 대해 조숙한 아이들은 이미 포르노 정도는 뗄만큼 뗐고, 무협지나 만화에 깊이 몰입하는 자기 세계를 견고하게 갖추고 있기도 하다. 6학년 중 독해력이 뛰어나 두각을 보이는 어린이가 나타나는데 경험적으로는 루쉰의 아큐정전을 해독할 정도의 아이도 있었다.

나이로 봐서는 13세이다. 역사적으로는 이 시기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종말적인 전성기이며 제2차 종교전쟁이 마무리되는 시점이다. 교황의 권력과 왕권이 충돌하며, 귀족이 성직자 권위에 서서히 반기를 들어 왕조 중심의 봉건사회로 진입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징기스칸이 유럽을 휩쓸어 동양인에 대한 두려움을 유럽인들에게 각인시킨 시기이기도 하고, 우리 민족은 몽고의 강압 통치로 민족 정체성이 졸지에 무너져 내리는 쓰라림을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아이들에게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시야를 틔어 줄 때이다. 세계 문화가 고대 문명 발상지로부터 유럽 중심으로 옮겨가는 때였고, 유럽제국들은 범선을 이용하여 식민지 개척을 탐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약소국과 강대국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세계가 정글법칙에 신음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한다. 희안하게도 유럽에서는 이 시기에 대학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 학문의 세계가 발아되었으나 아직 미몽의 사슬에 갇혀 있는 시기이다.

독일 발도로프 학교에선 6학년 시기가 되면 모짜르트를 지나 슈베르트에 접어든다. 아이들은 슈베르트 전기문을 구해다 읽고, 그의 삶을 음미하면서 그가 창조해낸 음악 세계에 탐닉한다. 열정적이고 감미로우며 때로는 처연한 슬픔의 세계를 종횡무진으로 생산해 낸 그의 음악세계는 이 시기 어린이 감정 세계와 흡사하다.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나타내려고 하는 특성이나, 새로운 감성세계에 쉽게 동화되는 여림은 이 시기 어린이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이 시기 아이들에게 역사 수업과 논리 수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역사 수업을 통해 세계를 폭넓게 인지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며 그를 바탕으로 자기 세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냉철한 논리를 바탕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시기이기도 하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9시 뉴스를 보고 내 생각을 이야기 할 줄 알아야 하며,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나이이기도 하다. 따라서 논술수업에서는 신문, 방송, 영화, 만화, 등 매체를 결합한 다양한 방식으로 통합적인 수업을 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

주제체험 수업이 나름대로 잘 받아들여질 나이이며 따라서 아이들 개개인에게 적합한 프로젝트 과제를 내어주고 그것을 스스로 수행해 나가는 방식도 많이 도입하여 학습 주체성을 키워야 할 때이다.


지난 6회에 걸쳐 초등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논술을 함께 공부해 오면서 개인적으로는 초등학생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고, 나이와 학년에 맞는 독서가 왜 필요한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독서토론 방식이 어떠하든 간에 나이와 개인차를 고려한 개성있는 독서지도가 꼭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은 것 같다.

폭발적인 관심을 보여주신 여러 선생님들에게 꼭 필요한 내용으로 강의가 이루어졌는지 무척 궁금하고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한다. 늘 초등 어린이들 삶에 관심이 있고 이 아이들 삶과 교육을 연구하면서 평생을 보내고자 굳세게 맹약하기도 하였으나 아직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감한다.

내공은 집중력 있게 연구하고 수련한다고 해서 쌓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어떤 궤도에 오르기 위해선 절대량의 학습에 의한 지식․경험의 축적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을 많이 만나고,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선생님들과 많이 고민하면서 연구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낀다.

6학년 어린이들에게도 여전히 주제 중심 수업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이 시기에는 모험심을 많이 길러 줄 필요가 있고, 예술에 대한 자기 태도와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함도 절실하다. 지식만 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가꿀 줄 아는 태도를 병행하여야 할 것이다.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게 하면서도 용감하고 정의로운 삶의 태도를 갖추게 하는 것이 우리가 노리는 독서논술 수업의 목표일 것이다.

생활 속에서 음악과 미술을 터득하고 자신의 것으로 가지게 하는 것이 초등시기에 꼭 필요한 일이다. 신세대들이 즐겨 소비하는 감각적며 말초적인 노래를 버리고 아름다운 동요를 부르게하여 그 마음에 평화를 깃들게 하며,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이 관습적이거나 관념적인 것보다는 좀 더 구체적이고 직관력에 의존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아무쪼록 6회에 걸친 강좌가 여러 선생님들께 하나의 참고 사항이라도 되었길 소망하며 끝까지 강의에 참여해 주신 고운님들께 고마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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