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교실

지렁이가 춤추는 공책 차분히 쓰면 나아져요

cassia 2006. 5. 11. 08:04
지렁이가 춤추는 공책 차분히 쓰면 나아져요

[한겨레]
인천목향초등학교 6학년 황혜련(12)양은 학급에서 ‘환경미화의 여왕’으로 통한다. 학급 게시판 등을 꾸밀 때 적극 나서서 솜씨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혜련이는 “친구들이 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하니까 자신감이 생기고 더 잘하고 싶어진다”고 했다. 혜련이가 애초부터 글씨를 잘 썼던 것은 아니다. 1년 전 배뚤배뚤한 글씨를 바로잡고 싶어 학원을 찾았고, 글과 그림이 담긴 포스터나 시화를 만드는 데 재미를 붙이면서 글씨가 나아졌을 뿐 아니라 쓰는 것 자체를 즐기게 됐다. 혜련이는 “공책 필기도 개성 있게 하고 싶어 날마다 이런저런 궁리를 한다”고 말했다.

컴퓨터 자판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에게 혜련이는 ‘별난 아이’로 비칠 수 있다. 초등 고학년만 되어도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해 숙제를 하는 요즘 글씨를 잘 쓰는 게 생뚱맞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글씨가 갈수록 형편없어진다는 생각에 전문 교재를 활용해 보기도 했다는 충북 진천 이월초등학교
이규태 교장은 “다른 공부도 바쁜데 꼭 글씨 쓰기까지 해야 하는지,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면 안되는 것인지 묻는 학부모들이 많았다”며 “글씨가 이렇게 소홀한 대접을 받는구나 절감했다”고 털어놓았다.

교사와 전문가들은 글씨 쓰기에 대한 관심이 날로 줄어드는 것이 쉽게 지나칠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초등학교 국어과 좋은 수업> 저자인 임용운(50) 전남 무안 삼향동초등학교 교감은 “글씨를 쓰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구조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정리해 가며 천천히 차분하게 글씨를 쓰는 것은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라고 강조했다. 임 교감은 “개성이 담긴 글씨로 다른 이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커뮤니케이션 행위이기 때문에, 남은 물론 자신도 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글씨를 못 쓴다면 중요한 소통의 매개를 잃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씨 쓰기가 한글 교육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한글학회 김한빛나리(41) 연구원은 “정성들여 ‘쓰기’보다는 손쉽게 ‘(자판) 치기’에 익숙해지면서 학생들의 한글 구사 능력이 떨어지고, 바른 우리말이나 맞춤법, 띄어쓰기 등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글씨 쓰기 교육에는 좋은 말을 가려쓰고 살려 쓰는 국어 교육도 포함된다”고 지적했다.

물론 무조건 글씨를 예쁘게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글씨 교정 학원인 ‘예쁜 글씨’ 이규택(45) 대표는 “대학 입시에 논술이 포함되면서 최근 글씨를 잘 쓰고 싶어하는 고교생들의 수강 신청이 부쩍 늘었다”며 “대부분 초등 저학년 때 글씨의 틀이 잡히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글씨에 자신이 없어지면서 작게 흘려 쓰는 버릇이 생겨 결국 남이 알아볼 수 없는 악필이 된 학생들”이라고 전했다.

글씨를 쓸 때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는 몇 가지 나쁜 습관을 고치고 자기 글씨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면 한결 좋은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획이 곧고, 받침글자의 아래 위 비율이 맞으면 누구나 알아보기 쉬운 좋은 글씨가 되는 것이지, 잘 쓴 글씨를 흉내내어 새로운 글씨체를 만들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찌감치 ‘쓰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일이다. 임용운 교감은 “초등학교 쓰기 교과에서 실제로 쓰기를 지도하는 시간은 40분 수업시간 중에서 15분 가량에 불과하다”며 “그것도 베끼기나 따라쓰기 위주이기 때문에 초등 1~2학년 아이들은 손이 아프다고 호소하거나 지루해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글씨를 잘 쓰려면 기본기를 다지는 훈련 기간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그 훈련을 신나고 재미있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방안들이 강구돼야 한다는 것이다.

전남
순천 청암대학 디자인과 장웅 교수는 글자를 그림처럼 그리고 쓰게 하는 방식이 영상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딸기, 여름 등 각 문자가 갖는 의미와 연상되는 이미지를 연결해 ‘그림문자’를 만들어 본다든지 크레파스, 크레용, 붓, 펜 등 다양한 필기구로 글씨를 써 보면서 자유롭게 글자와 놀아 보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장 교수는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보다 속도가 느리고 물리적으로 많은 노력이 들므로, 조금 불편하고 시간이 걸려도 직접 쓰면 더 즐겁고 개성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경 기자 friend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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