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추사 김정희

cassia 2005. 5. 30. 18:54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1786∼1856)/산숭해심 유천희해 (山崇海深 . 遊天戱海)/조선 19세기

 

 

秋史 金正喜(1786∼1856)/五岳六經(행서)/조선 19세기

 




秋史 金正喜(1786∼1856)/ 죽로지실/ 조선 19세기/ 30.0×133.7cm

 




秋史 金正喜(1786∼1856)/호고유시好古有時/조선 19세기

 



그의 서체는 옹방강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에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초기에는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을, 후기에는 송나라 소식(蘇軾)과 당나라의 구양순(歐陽詢)의 서풍(書風)을 본받았다. 그는 역대 명필을 연구하고 그 장점을 모아서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다. 이 밖에 전각(篆刻)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는데, 별호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 서화의 낙관에 사용하였고 추사체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독특한 추사각풍(秋史刻風)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풍기는 높은 경지의 문인화만을 높게 평가하고, 당시 화단에 만연해 있던 진경산수화나 풍속화 등을 낮게 평가하였다. 이로써 모처럼 일어난 민족적인 화풍의 세가 꺾이고 다시금 전통적인 문인화풍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역사상 예명(藝名) 을 남긴 사람들이 많지만 김정희만큼 그 이름이 입에 오르내린 경우도 드물다.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도 학문 예술의 각 분야별로 국내외 여러학자들 사이에서 일찍부터 이루어져왔다. 그 결과 그는 단순한 예술가 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전환기를 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왕조의 구문화제체로부터 신문화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선각자로 평가된다.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 작고하였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담연제집(潭연濟集)》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와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등이 있다./
출처 : 담원 갤러리

   

   
 


 

 

추사 김정희 ( 1786~1856 정조 10∼철종 7)

 

난초꽃과난초잎이 산중 서재에 있는데
蘭花蘭葉在山房


어디에서 부는 가을바람이 사람의 애를 태우네
何處秋風人斷腹


바람과서리에 쉽사리 꺽인다면
若道風霜易?折


어찌 오래도록 산중 서재에 향기를 남기겠는가!
山房那得長留香

 

 

김영동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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