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144) 파리 떼 출현과 조선인 구보 씨

cassia 2019. 10. 3. 08:35



(144) 파리 떼 출현과 조선인 구보 씨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을 때 일이다. 일제강점기 소설가 '박태원'의 이름이 잠시 인터넷 실검 순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봉 감독의 외할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이광수, 김동인의 이름도 아스라하게 느끼는 요즘 대중들에게 박태원은 어찌 보면 이름조차 낯선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동안 박태원은 손자 봉준호에 버금가는 인기와 역량을 지닌 소설가였다. '조선의 모던보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는 상상력이 가득하고, 재치발랄한 작가였다.

'최후의 억만장자'(1937)는 그런 재치 발랄함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이다. '최후의 억만장자'는 당대 프랑스 인기영화에서 모티프를 따온 콩트로 그 내용이 기상천외하다.

트레몰로라는 나라에서 국가의 안정정책에 따라, 이미 30년 전 박멸된 파리 떼가 갑자기 출현한다. 정부는 파리 떼를 없애기 위해 국가총동원령을 내리고 '파리박멸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파리를 잡기 위해 천 오 백 개의 파리채와 삼천 개의 파리약을 독일에 주문하는 한편 파리 떼를 풀어 국가적 교란을 일으킨 주범 찾기에도 전력투구한다.

마침 트레몰로를 방문 중이던 셜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이 이 사건에 개입한다. 결국 조선에서 온 '구보'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진범을 밝혀내고, 사건을 해결해 트레몰로에 안정을 가져다주며 콩트는 끝이 난다.

콩트가 발표된 1937년 6월 말, 참으로 지루하고도 긴 조선의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발표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7월 초, 중국 루거우차오에서 일제와 중국군과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이에 일제가 기다렸다는 듯 중국과 전쟁을 시작한다. 조선 합병 때부터 계획해둔 전쟁이었다.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방해되는 모든 잡음을 제거하고자, 통제와 내부단속은 필수적이었다. 10여 개월 전, 동아일보의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일제의 신경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약간의 소음도 용서되지 않는 진공과 같은 상태가 조선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 긴장감 속에서 박태원은 파리박멸 이야기라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콩트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리 내어 웃으면서 잠시 일제 지배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웃음의 끝에서 몇몇 예민한 사람들은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이 이상한 나라의 상황이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것을. 파리 떼까지 국가 통제 아래 두었던 트레몰로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일제치하의 현실 그대로였던 것이다.

박태원이 길고 힘든 여름을 앞둔 조선인들에게 준 것은 웃음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샬록 홈즈와 아르센 뤼팽을 제치고 난제를 해결한 조선인 구보씨. 서양인을 제패한 구보씨의 위대한 능력을 보면서 조선인들은 무기력함 속에서도 작지만 큰 희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사진(右) : 박태원 '최후의 억만장자' 삽화 (조선일보, 1937.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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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 출처 : 매일신문 2019-10-03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