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115) '이완용 사망설'과 이광수 불쾌감의 근원

cassia 2018. 8. 16. 17:19



(115) '이완용 사망설'과 이광수 불쾌감의 근원

 

1909년 12월 22일 수요일. 이광수 일기는 단 한 줄로 끝난다. "이완용이 죽었다!" 매일 기입하던 날씨 기록도 빠트린 것을 보면 이광수는 일기를 쓰면서 상당히 흥분해 있었던 듯하다. 이날 이완용은 귀가 길에 한 조선인에게 습격을 당하여 죽음에 이를 정도 큰 상처를 입는다. 이완용이 죽었다고 일기에 쓴 것을 보면 이광수는 이 상황까지만 전해 들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완용은 이광수 기대와는 달리 용케 목숨을 건진다. 그 때문일까. 다음 날 이광수 일기는 '감기로 아주 불쾌하다'는 말로 시작된다.

이 해 이광수는 열여덟 살이었고 일본 유학 오년 째였다. 열정과 의기, 민족의식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이광수의 일기를 읽다가 보면 감기를 핑계로 내세운 이광수 마음의 불쾌함이 과연 이완용 한 사람의 죽음으로 해소될 수 있었던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 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이광수는 한 해 읽은 책 제목을 쓰면서 일기를 마무리 한다. 그 제목을 열거하자면 바이런 시집, 고리키 소설집, 톨스토이 소설, 그리고 몇 몇 일본작가의 소설이다. 모두 일본어 창작물이거나 일본어 번역 소설이다.

이광수를 비롯한 조선 신청년들은 일본근대문학을 통해서 문학과 새로운 세계를 배우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일본이 번역한 서구문학을 통해서 서양의 새로운 사상과 문학,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로마에 반기를 든 스파르타쿠스 연설문을 담은 이광수 '혈루(血淚)'(1908) 역시, 일본어로 번역된 서양 역사물에 빚 진 바 컸다. 이처럼 이광수에게 있어서 일본은 근대적 세계로의 문을 열어주는 고마운 안내자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조선을 지배한 침략자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광수를 비롯한 조선 신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친 일본근대문학 작가 대다수가 어쨌건 강력한 일본의 성립을 희구한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지식의 근원이며 안내자인 일본 그리고 침략국 일본, 이광수는 이 사이에 서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혼란 속에 있으니 마음이 불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심리적 혼란과 불쾌감은 이완용 한 사람의 죽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제국을 통해 신문물을 흡수했던 식민지 조선 엘리트 일반이 직면한 혼란이었다. 이 혼란 속에서 누군가는 그래도 조선의 독립을 향해 나아갔고, 더 많은 누군가는 친일을 선택했다. 예를 들자면 청년 이광수는 이완용의 죽음을 기대하였지만 장년의 이광수는 이완용이 선택한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인간들의 복잡다단한 삶의 여정이 모여서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 낸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개항기 조선을 다룬 모 드라마의 역사 왜곡 논란이 분분하다. 그 중에는 식민사관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비판도 있다. 드라마 속 조선이 너무 무능하게 그려졌다는 것이 이유이다. 이런 논란이 제기된다는 자체가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우리사회도 민족의 '신화'를 넘어 인간과 역사를 바라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역사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이 가능해질 때 역사는 현재 우리 삶에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사진 : 젊은시절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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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 출처 : 매일신문 2018.08.16(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