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113) 이시카와 다쿠보쿠

cassia 2018. 7. 21. 10:14



(113) 이시카와 다쿠보쿠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말과 행동으로 나누기 어려운/단하나의 그 마음을/빼앗긴 말 대신에/행동으로 말하려는 심정을/자신의 몸과 마음을 적에게 내던지는 심정을/그것은 성실하고 열심인 사람이 늘 갖는 슬픔인 것을" 스물 여섯 살 나이로 요절한 일본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 '코코아 한잔'(1911)의 한 구절이다.

일본인들의 찬탄을 한 몸에 받은 이 시인에게 일제강점기 조선 지식인들 역시 흠모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시인 백기행은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石(이시)'을 따서 필명을 백석으로 지었는가 하면, 무용가 최승희는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또한 소설가 박태원은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모델로 한 인물을 내세운 소설을 창작하기도 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감성적인 시, 삶을 담은 수필은 수많은 조선 지식인들의 공감을 얻고, 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는 일본인이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심(詩心)이 아무리 맑다고 해도 그는 조선을 침략한 일본 제국의 사람이었다. 이 일본 시인과 조선 지식인들 간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뛰어넘기 힘든 거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왜 수많은 조선 지식인들은 이시카와 다쿠보쿠라는 일본 시인에게 그처럼 공감했던 것일까.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1910년 8월 29일.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9월 어느 날,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구월 밤의 불평'이라는 시를 발표한다. 시의 화자는 "지도 위/조선나라에 새까맣게/먹물을 칠하면서 가을바람을 듣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을바람이 전하는 쓸쓸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일 년 전 조선인 안중근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를 떠올리고는 "누가 나에게 저 피스톨이라도 쏘아줬으면/이토 수상처럼/죽어나 보여줄 걸"이라며 일제의 침략행위에 대해 조용히 속죄한다.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의 죄를 물어 일본 사회의 존경을 받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 1909년 10월, 천황제를 위태롭게 했다는 죄로 일본 사회에서 26명이나 되는 지식인이 대량 검거된 것이 1910년 5월. 엄혹한 시대였다. '구월 밤의 불평'이 발표된 시기는 일본정부에 대한 사소한 비판조차 목숨을 걸 정도의 큰 용기가 필요한 때였다. 이시카와 다쿠보쿠가 일본의 조선침략을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런 시기였다.

망국 조선의 운명을 안타까워한 이 일본 시인에게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공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그는 침략국의 일원이 아니라 동일한 세상을 지향한 동지였다. 그들이 지향한 세상이란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테러리스트의 슬픈 운명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그런 곳이었다. ......
사진
: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1886-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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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 출처 : 매일신문 2018.07.21(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