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105) 유길준의 ‘서유견문 ‘과 언문일치

cassia 2018. 3. 31. 03:52



(105) 유길준의 ‘서유견문 ‘과 언문일치

 

150여 년 전 일본에서 알파벳, 즉 로마자로 일본말을 표기하자는 주장이 나온 일이 있다. 일본인의 지극한 서양 사랑이라고 섣부르게 비난하기에는 말과 글 일치를 향한 이 시기 일본 사회의 열망이 너무나 강렬했다. 일본은 우리처럼 오랫동안 말과 글이 달랐다. 자국 문자인 가나문자가 있었지만 소수 지배층은 한문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글을 썼으며 관공서의 공문 역시 모두 한자로 표기되었다. 중국을 거쳐 들어온 서양 책 역시 한문으로 쓰여 있었다. 당연히 문화와 지식은 소수 지배층의 것이었다. 나라는 하나였지만 문화도, 말을 적는 글도, 그 글을 사용하는 사람도 둘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다.

근대적 일본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보기에 서양에 버금가는 강력한 일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일본인이 서양의 앞선 지식을 골고루 익히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과 글을 일치시키고, 누구나 쉽게 익히고 이해할 수 있는 문자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로마자 표기라는 충격적 발상은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이 발상은 채택되지 않았다. 그 대신 말과 글 일치를 위하여 한자와 가나문자를 적당하게 배합한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만들어 말과 글을 일치시켜갔다. 말과 글을 일치시키기 위한 노력은 근대초기 조선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1895)은 그 시작을 알리는 글이다.

유길준은 1881년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메이지 유신이 한창이던 일본을 방문하여 서양을 배웠고, 1883년에는 보빙사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지식으로서만 배운 서양 근대를 직접 경험하였다. ‘서유견문’은 바로 그 지식과 경험의 결과물이다. 책은 세계 지리 및 서양의 근대적 개혁, 유럽 기행문을 내용으로 담은 총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을 세계 중심으로 믿고 있고, 남녀는 유별하다고 배워왔던 조선 독자들에게 서양의 근대적 풍경을 담은 이 책은 새로우면서도 혁명적이었다.

내용 이상으로 혁명적인 것은 문체였다. 한문 대신 한자와 한글을 섞어 만든 새로운 문체를 사용한 것이다. 그 새로운 문체는 근대 수용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던 일본과 근대 서양을 두루 거친 유길준의 깨달음의 결과였다. 한글과 한자를 섞은 새로운 문체로 글을 쓰는 일이 유길준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학을 습득하여 한문을 줄곧 사용해왔기에 국한문체 글쓰기는 외국어 글쓰기만큼 어렵고 힘들었다. 그러나 조선이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서양을 배우도록 해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게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읽기 쉬운 문체로 써야만 했던 것이다.

지난 22일 공개된 대통령 개헌안이 주목을 끌고 있다. 헌법의 한자식 표현을 한글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공문서를 일반 국민이 알기 쉬운 용어와 문장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 주된 뜻이었다. 개헌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는 여기서 일단 뒤로 미루어 두기로 하자.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한글 문체를 사용하고 일본식, 한자식 표현을 배제한 것에 일단 초점을 둬보자. 새로운 문체 적용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번 개헌안은 혁명적이며 민주적이다. 특권층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공문서를 국민 일반에게 개방하는 첫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국민이 주도하는 시대정신이기도 할 것이다. ......(사진 : 유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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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경북북부연구원 연구이사 / 출처 : 매일신문 2018.03.31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