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 칼럼

[정혜영의 근대문학](97)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 ‘과 인문학의 위기

cassia 2017. 12. 2. 10:44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 ‘과 인문학의 위기

 


1934년 조선의 봄은 겨울보다 추웠다. 1929년 세계 전체를 휩싼 뉴욕발(發) 대공황의 광풍이 가난한 식민지 땅 조선에도 어김없이 불어닥쳤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에 흘러넘쳤다. 잡지와 언론에서는 '취직 운동하는 방법'에서부터 '소(小)자본 창업항목' 등 대량 실업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법을 다룬 기사를 속속 실었다. 청년 엘리트들도 이 광풍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일본 유학생이라는 빛나는 훈장을 가슴에 달고 귀국했지만, 고학력 엘리트는 흘러넘치고 일자리는 없는 조선 현실 속에서 그들이 몸을 둘 만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1934)은 바로 이들 '레디메이드, 즉 문화예비군'이라 불리는 고등 실직자의 삶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P'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이지만 대량 실직난이 휘몰아친 조선에서 취업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고전하는 인물이다. 가진 돈이라고는 이틀 전 전당포에서 겨울 외투를 저당 잡히고 받은 4원이 전부인데 그나마도 싸구려 담배를 내미는 담배 가게 주인에게 '욱'해서 고급 담배를 사는 바람에 3원 75전밖에 남지 않은 상태이다. 생존을 담보할 금쪽같은 3원 75전까지 친구들과 함께 간 싸구려 술집에서 '욱'하는 기분에 단번에 탕진해버린다. 이처럼 '욱'하는 심리적 불안정성은 P의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이제 겨우 아홉 살 된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대신 인쇄공으로 취직시켜버리는 것 역시, 한 끼 밥도 만들어주지 못하는 무용한 지식에 '욱'해서이다.

소설은 P라는 인물이 왜 이처럼 쉽게 '욱'하면서 자포자기의 삶을 살게 된 것인지 그 원인을 찾아간다. '바가지를 쓰고 벼락을 막으려고 했던'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에서부터, 일제의 잘못된 식민정책, 마침내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인이 원인으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원인은 물론 해결방안까지 안다고 한들, 일제 식민지에 불과한 조선이 주체적으로 선택할 방안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원인도 알고, 해결 방법도 알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이보다 인간을 '욱'하도록 만드는 것이 있을까.

뉴욕발 대공황이 없었다고 해도 조선 청년 엘리트들은 고단한 삶을 피할 수 없었다. 식민지의 척박한 현실에서 과연 누가 편안할 수 있었을까. 경제적으로 일제에 종속된 가난한 조선이었던 만큼 문과 출신 고학력자들 경우, 그 삶은 참으로 신산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월호 잡지 판매라든가 1개 신문 구독료로 5, 6개의 신문을 서로 돌려 읽는 신문윤독사업이 인기 창업 종목이었을 정도로 책과 신문이 삶의 중심에 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최근 청년실업이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문과' 전공 졸업생의 위기가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무거운 미래 전망까지 나오는 이 시대에 인문학마저 자취를 감춘다면 인간들은 어디에 마음을 둘 것인가. 1960, 70년대 국가가 나서서 중화학, 철강 같은 기초 산업을 유치산업으로 보호하고 육성했듯이 인문학 분야를 유치학문 분야로 지정해서 보호하고 육성해야 할 때이다. ......(사진 : 주인공 P가 구입한 25전짜리 값비싼 담배 마코(앵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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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대구대학교 기초교육대학 초빙교수 / 출처 : 매일신문 2017.12.02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