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박경리「옛날의 그 집」(낭송- 나희덕)

cassia 2017. 8. 7. 17:16

박경리「옛날의 그 집」(낭송- 나희덕)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출처 :『현대문학』2008년 4월호


詩 – 박경리: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55년『현대문학』에 소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토지』『김약국의 딸들』등이 있으며, 호암상, 보관문화훈장, 월탄문학상 등을 수상함. 2008년 5월 타계함.


낭송- 나희덕: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 시집『그곳이 멀지 않다』『뿌리에게』『사라진 손바닥』등이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문학집배원으로 활동함.


박경리「옛날의 그 집」을 배달하며


박경리 선생님이 떠나신 지도 한 달이 되어갑니다. 『토지』라는 거대한 기념비를 세운 소설가이셨지만, 그분의 마음에는 이런 오롯한 시인도 살고 있었나 봅니다. 세상을 향해 남기신 이 마지막 시는 선생님의 삶과 문학을 담담하면서도 힘있게 갈무리해놓은 묘비명 같습니다.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 선생님은 옛날 그 집에서, 십오 년을, 혼자,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토지』의 후반부를 완성하셨지요. 사마천이 궁형의 고통을 이겨내고 『사기』를 썼던 것 처럼요. 오직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로 지탱한 삶이란 얼마나 눈부시게 시리고 고독한 것이었을까요.

 

문학집배원 나희덕.2008년 6월 2일. / 사이버문학광장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