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이건청, 「그 말이 아직 망아지였을 때」(낭송 조동범)

cassia 2013. 12. 10. 06:00

    이건청, 「그 말이 아직 망아지였을 때」(낭송 조동범)
     


     

    이건청, 「그 말이 아직 망아지였을 때」

     

    그 말이 아직 망아지였을 때, 고삐에 묶이지 않았을 때, 되새 떼는 연둣빛 시간 속, 질경이풀 질펀한 둑방길 끝에서 날아오르곤 하였다. 새들이 희미한 물감처럼 번지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새들이 사라진 빈 하늘에 노을이 선홍의 물감을 퍼부으며 다가오곤 하였다. 그 말이 아직 망아지였을 때,

      

       그 말이 아직 망아지였을 때, 둑방길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몇백 년 한 곳에 서서 거목의 안목으로 자라면서 이 둑방길을 오가는 망아지를 바라보곤 하였다. 망아지가 자라 큰 말이 됐을 때 짊어져야 할 채찍과 박차, 그리고 고삐로 가득 찬 시간을 생각하는 것이 느티나무는 슬펐다.

     

       그 말이 아직 망아지였을 때, 황혼녘 둑길을 밟고 돌아오면서 느티나무 크고 굵은 뿌리가 물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느티나무가 거목으로 자라서까지 저 7만 개나 8만 개의 신록을 위해 힘겹게 흙을 밀고 서 있는 걸 바라보았다. 꺾이고 무너진 가지들을 일으켜 세우며 그늘 속으로 매미를 부르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이 아직 망아지였을 때,

     

       늙은 말 한 마리가 있었다. 쓰러져 있었다. 회색빛 하늘이 걸리고, 기일게 늘어난 시계 위에서 새까만 벌레들이 빠글거리고 있었다.* 늙은 말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시_ 이건청 – 1942년 경기도 이천 출생.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와 196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이건청 시집』, 『하이에나』, 『코뿔소를 찾아서』,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 기록』, 『굴참나무 숲에서』 등이 있고 시선집으로 『이건청 시선집』(전4권) 등이 있다.

       낭송_ 조동범 – 1970년 경기도 안양 출생. 2002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그리운 남극」 등 5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산문집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문학평론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등이 있음.

       출전_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세계사)

       음악_ Digital Juice – Speech

       애니메이션_ 김은미

       프로듀서_ 김태형


    이건청, 「그 말이 아직 망아지였을 때」를 배달하며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짐승으로는 말(馬)입니다('망아지였을 때'을 전제로 한다면 인간의 말(言)도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겠죠?). 망아지처럼 어여쁜 것이 또 있을까요. 그 부피감과 날렵함, 덩치를 이기는 순진함. 어미의 뒷다리에 기대어 거만을 떠는 망아지의 자세는 정말 최고입니다. 아무데고 가리지 않고 뛰는 무애(无涯)의 달음박질은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운명은 슬퍼서 어른이 되면 재갈을 물어야 하고 박차를 맞아야 합니다. 몸을 바꿀 때에야 그것을 벗습니다. 어여쁨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어디 시간뿐입니까.    

     

    망아지처럼 살게 해 줘, 망아지처럼 살게 해 줘, 내 멋대로 살게 좀 내버려 둬. 예술이라는 망아지가, 점점 좁아지는 울타리를 바라봅니다.

    *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기억의 그림〉

     

    문학집배원 장석남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