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권선희, 「집어등(集魚燈)」(낭송 선정화)

cassia 2013. 10. 23. 05:47

    권선희, 「집어등(集魚燈)」(낭송 선정화)
     

     

     

    권선희, 「집어등(集魚燈)」

     

    집어등을 하나 얻었다
    망망대해에서 삐끼질 하는 놈
    수천 촉 아찔함을 쏘며 오징어떼 후리는 놈 치곤
    참 순하게 생긴 녀석이다

     

    저녁이 오자
    오두막엔 잘잘한 별들이 내려앉고
    축항을 치는 파도소리 크다

     

    백열등 알전구라도 빼고
    끼워보고 싶었지만
    어디에도 대갈통만한 녀석을 끼울 똥꼬는 없다

     

    결국 시든 꽃을 뽑고 꽃병에 꽂았다
    꽃병은 맙소사 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균형을 잡고 투명한 등을 환하게 떠받들더니
    오색 깃발 펄럭이며
    멋지게 출항했다

     
    시_ 권선희 – 2000년부터 구룡포에 들어가 글을 쓰며 산다. 시집 『구룡포로 간다』, 공동르포집 『예술밥 먹는 사람들』, 일제강점기 일본인 어부들의 구룡포 진출 과정을 다룬 2인 공저 다큐 『구룡포에 살았다』를 발간하였으며, 제1회 대한민국해양영토대장정 기록 작가로 참가, 2,100km 바닷길을 항해했다.

    낭송_ 선정화 – 배우. 연극 '김영하의 흡혈귀', '아 유 크레이지' 등에 출연.

    출전_ 구룡포로 간다 『구룡포로 간다』(애지)
    음악_ 권재욱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권선희, 「집어등(集魚燈)」을 배달하며

     

    누구나 몇 번씩은 갈림길을 만나지요. 인생을 바꿀만한 중대한 길목에 서게 되지요. 나도 예외 없이 스무 살이 될 무렵 한 갈래 길이 강한 자력으로 부르더군요. 그러나 가지 못했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때 그 갈대 숲 사이로 난 길을 가야 했어요. 좀 예예한 그 길로 과감히 걸어가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해요.  

     

    하늘의 별빛이 비추는 길이 아닌, 전등불이 밝힌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의 운명이지요. 집어등을 쫓는 점에서 저 동해바다의 오징어 떼나 별반 다를 게 없어요. 강력한 불빛에 취해 가다가 가짜 미끼를 물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죠. 아직 그 미끼를 물지는 않았다고요? 그렇다면 참 다행입니다. 이제라도 좀 침침한 길로 접어들어 갈 필요가 있어요. 별자리 아래로 가는 길, 산을 뚫고 가는 길이 아니라 바윗길을 돌아 넘어가는 등성이 길로 갈 필요가 있어요. 덫이 없고 '집어등'이 없는 길이지요.

     

    집어등의 '용도 변경'이 아름다운 시입니다. 꽃병에 꽂아(꽃병보다 더 크지 않았을지) 꽃배를 만들어 오징어가 아닌, 꽃을 모으러 가는 빈 배가 보입니다. 우리 인생의 용도를 생각해봅니다. 충혈된 불(욕망) 끄고 그 '용도'라는 것도 끄고 무심히 흘러가는 꽃. 뜨겁지 않고 서늘한 꽃.

     

    문학집배원 장석남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