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박후기, 「자전거를 배우는 아버지」(낭송 박후기)

cassia 2013. 9. 17. 06:29

    박후기, 「자전거를 배우는 아버지」(낭송 박후기)
     


     

     

    박후기, 「자전거를 배우는 아버지」

     

    파밭에 고꾸라진 아버지가

    파꽃처럼 짧게 쳐올린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자전거와 함께 일어서는 저녁이었다

     

    어린 내가

    허리 부러진 대파와 함께

    밭고랑에 드러누워

    하얗게 웃던 밤중이었다

     

    식구들이 깔깔거리며

    대문 밖을 내다볼 때,

    입 벌린 대문 깊숙한 곳에 매달린 알전구가

    목젖처럼 흔들렸다

     

    아버지!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지 마세요

    아버지를 태운 자전거처럼,

    한쪽으로 기운 살림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환한 파밭의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늘 같은 자리만 맴도는구나,

    벗겨진 체인을 끼우고

    손으로 페달을 돌리며 아버지가 말했다

     

    어머니는 허리 부러진 파를

    뒤란에 옮겨 심었다

    흙 속에 뿌리만 묻은 채

    옆으로 누워 잠자는 대파들처럼,

    식구들은 옹기종기

    한 이불 속에서 대파 같은 다리를 묻고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자전거를 배우지 못했다

    자식들은 아버지보다 많이 배웠지만

    아버지보다 많은 것을 알진 못했다


    시·낭송_ 박후기 – 1968년 경기도 평택 출생. 2003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등이 있음.

    출전_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실천문학사)

    음악_ SHK

    애니메이션_ 박지영

    프로듀서_ 김태형


     

    박후기, 「자전거를 배우는 아버지」를 배달하며

     

    마당에 파를 심었군요. 우리 집도 그랬었는데. 파꽃이 파리하게 피었었군요. 가정의 창백한 웃음처럼 말이죠. 우리 집도 그랬었는데. 파들이 흰 허벅지를 드러내며 한쪽으로 넘어졌었군요. 우리 집도 그랬었어요.

     

    뒤늦게 자전거를 배우시는 아버지는 위태롭죠. 아이들보다 위태로워요. 아이들보다 몸도 무겁고 아이들보다 순발력도 떨어져요. 게다가 새삼스레 구경꾼까지 있어요. 침침한 대문간의 '알전구' 같은, 목젖을 드러낸 구경꾼(식구들)들의 웃음 속에는 울음이 가득해요. '만학도' 아버지의 아슬아슬한 자전거 배우기는 하필 왜 파밭으로만 고꾸라지는지. 

     

    그러니까 우리들의 가정이 아직은 규모가 있었을 때, 저 70년대나 80년대 즈음, 자동차 운전이 아닌 자전거를 배워야 하는 사회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그게 그리 먼 옛날도 아니건만 가슴이 푸르게 물들어요.

     

    '벗겨진 체인을 끼울' 때 기름때가 묻어 시커먼 손을 기억해요. '같은 자리를 맴돌며', 쓰러지며 추운 대파들을 일으키고 옮겨 심고 돌봐야 했던 우리들의 아버지는 이제 서럽게도 기일(忌日)의 사진 속에서 씁쓸한 웃음을 짓고 계시죠.


    문학집배원 장석남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