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장마 시 모음> 김재진의 '장마' 외

cassia 2013. 8. 3. 09:50

    <장마 시 모음> 김재진의 '장마' 외

     

     

    + 장마

     

    햇볕에 말리고 싶어도 내 마음
    불러내어 말릴 수 없다.
    더러우면서도 더러운 줄 모르는 내 마음의 쓰레기통
    씻어내고 싶어도 나는 나를
    씻어낼 줄 모른다.
    삶이란 하나의 거대한 착각
    제대로 볼 수 없어 온몸이 아프다.
    (김재진·시인, 1955-)

     

     

    + 장마 뒤
     
    엄마가 묵은 빨래 내다 말리듯
    하늘이 구름조각 말리고 있네
    오랜만에 나온 햇볕 너무 반가워.
    (서정슬·아동문학가, 서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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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마

     

    하느님도
    우리 엄마처럼
    건망증이 심한가 보다
    지구를 청소하다가
    수도꼭지 잠그는 걸
    잊어버린 모양이다
    콸콸콸뫌,
    밭에 물이 차서
    수박이 비치볼처럼 떠오르고
    꼬꼬닭도 알을 두고
    지붕 위에서 달달 떨고
    새로 산 내 노란 우산도
    살이 두 개나 부러졌는데
    아직도 콸콸콸콸
    하느님, 수도꼭지 좀 잠궈 주세요.
    (조영수·아동문학가, 충남 유성 출생)


     

    + 칠월령 - 장마 

     

    칠칠한 머리채 풀어
    목을 놓아 울고 싶구나

    뼈가 녹고 살이 흐물도록
    이승 너머 저승까지

    모질게 매듭진 인연
    그만 녹여 풀고 싶구나.
    (유안진·시인, 1941-)


    + 장마

     

    비는 잠시
    그치고
    내 생각은 영영
    잠기고,
    (김안로·시인)

     


    + 장마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 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 다오.
    (천상병·시인, 1930-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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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마

     

    바람에 누운
    풀잎 위로
    바쁜 물들이 지나간다
                 
    물 속에서
    더 짙어진
    달개비의 푸른 눈썹
                 
    세상은
    화해의 손을
    저리 오래 흔들고 있다
    (강현덕·시인, 1960-)


     

    + 장마 무렵

     

    하찮은 말에도 생채기는 생겼다
    예전의 넉넉함은 어디로 가고
    불평만 습성처럼 쌓이는지
    재채기와 콧물과
    발열 두통을 호소하던 하늘
    끝내 오한으로 드러눕는다

    가시 박힌 손톱 밑이 얼얼하더니
    터질 듯이 부어오른다. 
    (김희경·시인) 


     

     

    + 장마

     

    일년에 한 번은
    실컷 울어버려야 했다
    흐르지 못해 곪은 것들을
    흘려보내야 했다
    부질없이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려야 했다

    눅눅한 벽에서
    혼자 삭아가던 못도
    한 번쯤 옮겨 앉고 싶다는
    생각에 젖고

    꽃들은 조용히
    꽃잎을 떨구어야 할 시간

    울어서 무엇이 될 수 없듯이
    채워서 될 것 또한 없으리

    우리는 모두
    일 년에 한 번씩은 실컷
    울어버려야 한다
    (최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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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마의 추억

     

    어릴 적 장마는 긴 기다림이다
    물 새는 지붕과 벽면 곰팡이가
    전장의 기념비 같은 커다란 지도를
    상처처럼 남겨
    고단하게 살아가던 궤적으로 쌓였다

    우묵 배미 안마당
    정강이 넘게 흙탕물이
    문지방에 찰랑거릴 때쯤
    붉은 기와 용마루에도 틈이 자라서
    하늘이 보이고
    천장을 적시며 영토를 넓혀가

    물받이 그릇이
    방 안 가득하던 시절에도
    우리는 강가로 물 구경 갔다
    (강정식·시인, 1941-)

     


    + 장맛비가 내리면

     

    한 사나흘
    나도 물이 되어볼란다

    내리는 비만 탓하지 않고
    나도 물이 되어볼란다

    독방 속에 갇힌 수인(囚人)처럼
    단단한 내 마음의 벽안에 갇혀

    벽지만 후벼파던 결별의 세월
    아, 이제사 나도 물이 되어볼란다

    제 모양만 고집하지 않고
    담기는 대로 네가 되어주는

    자유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이제사 나도 바다로 가볼란다
    (홍수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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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마철을 나는 법 

     

    "얘야, 잘 여문 곡식도 장마철엔 벌레 슨다
    바깥 공기 들지 않도록 잘 묶어라
    차고 서늘한 곳에 두는 것도 잊지 말고
    자칫 구멍 나면 다 버려야 한다"

    어머니는 오늘도 전화로
    나를 보관하는 법 조용히 일러주신다
    귀 닫고 입 닫고 제 숨통 틀어막고 버티는 일이
    온전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숨이 막히고 가슴이 끓어도 어머니가 계시는 한 나는
    내 삶의 봉지를 구멍 낼 수 없다
    (문숙·시인, 경남 하동 출생)


     

     

    + 장마

     

    긴 슬픔이 있는 날에는 장맛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나뭇잎들이 미친 듯이
    목놓아 울다보니 시궁창이 범람했다

    미움
    원망
    사랑해서 사랑해서 어쩌지 못한 그리움
    폭풍우 휩쓸고 가면
    맑은 하늘 쌩긋 미소 짓는다

    긴 아픔이 있는 날에는 장맛비 내렸으면 좋겠다
    거친 숨소리 바람에 실려 가면
    넋이 나간 듯이 찾아오는 쉼표
    늦은 오후 뽀얗게 하늘 열렸다

    사뿐해진 발걸음
    개망초 꽃이 기운 몸을 일으키며
    다시 흐드러진다
    산다는 건 그런 거야
    흔들리며 사랑하며
    원망하며 그리워하며
    쓰러져도 풀씨 하나 남기는 거야
    (오순화·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