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최승호, 「무인칭의 죽음」(낭송 이혜미)

cassia 2013. 6. 17. 16:47

    최승호, 「무인칭의 죽음」(낭송 이혜미)


     

     

    뒷간에서 애를 낳고
    애가 울자 애가 무서워서
    얼른 얼굴을 손으로 덮어 죽인 미혼모가
    고발하고 손가락질하는 동네사람들 곁을 떠나
    이제는 큰 망치 든
    안짱다리 늙은 판사 앞으로 가고 있다 

     

    그 죽은 핏덩어리를
    뭐라고 불러야 서기(書記)가 받아쓰겠는지
    나오자마자 몸 나온 줄 모르고 죽었으니
    생일(生一)이 바로 기일(忌日)이다
    변기통에 붉은
    울음뿐인 생애,
    혹 살았더라면 큰 도적이나 대시인이 되었을지
    그 누구도 점칠 수 없는 

     

    그러나 치욕적인 시(詩) 한 편 안 쓰고 깨끗이 갔다
    세발자전거 한 번 못 타고
    피라미 한 마리 안 죽이고 갔다.
    단 석 줄의 묘비명으로 그 핏덩어리를 기념하자 

     

    변기통에 떨어져
    변기통에 울다가
    거기에 잠들었다 

     
    시_ 최승호 –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 1977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대설주의보』,『세속도시의 즐거움』,『그로테스크』,『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고비』,『아메바』등이 있고, 그림책으로는『누가 웃었니?』,『이상한 집』,『하마의 가나다』,『수수께끼 ㄱㄴㄷ』,『구멍』,『내 껍질 돌려줘!』가 있다. 동시집으로는『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집 1(모음 편), 2(동물 편), 3(자음 편), 4(비유 편), 5(리듬 편)』,『펭귄』이 있다.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송_ 이혜미 – 시인. 1988년 경기 안양 출생.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보라의 바깥』이 있다.

     

    출전_ 진흙소를 타고(민음의 시 8)(개정판) ☜ 클릭『진흙소를 타고』(민음사)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민경
     
    프로듀서_ 김태형
     

     

    최승호, 「무인칭의 죽음」을 배달하며

     

      수수만년 인간이 걸어온 과정에서 각자에게 이름이 붙은 것은 겨우 일주일 전입니다. 게다가 거기 인칭의 계급이 생긴 것은 엊그제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제 인칭을 높이자고 모두가 힘겨워하는지 모릅니다. 인간 역사를 되돌아보면 그처럼 허망한 일도 없는데 말입니다. 대통령이라는 이름, 장관, 국회의원, 변호사, 판사, 목사, 인권운동가, 사회사업가, 회장님, 사장님, 화가, 시인, 작가…… 높고 낮다는 각각의 이름 앞에 얹은 모자들.
     

     이건 어떨까요? 꾀꼬리, 파랑새, 벌, 나비, 목련, 수련, 해바라기…… 그래도 꾀꼬리가 제일 낫겠다고요? ‘꾀꼬리…… 해바라기’에 가장 가까운 직업은 뭘까요? 대통령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이름자 하나 지키며 살자는 데 동의합니다. 그런데 여기 무인칭의 생이 있었으니 이러한 생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종교로 열리는 질문입니다. 죄 짓지 않은 생애, 죄 지을 틈도 없었던 생. 어쩌면 죄 지을 틈은 있어야 인생 아닐까요? 치욕스런 시라도 지어야 시인이듯이.

     

    문학집배원 장석남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