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이승희, 「아무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낭송 이승희)

cassia 2013. 6. 10. 13:48

    이승희, 아무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빛을 뿜어내는 텔레비전 한 대가 있는 헌책방」(낭송 이승희)

     

     

     

    헌책방 불빛은 참 착하다. 저녁 내내 그 불빛 아래에서 헌책처럼 말이 없던 사내와 그 사내를 닮아 더욱더 말이 없는 의자가 말없음으로 서로 껴안고 우는 시간에도 가만히 그 등을 두드려주지 않던가. 그렇게 등 두드리는 불빛의 손을 보았다. 제목이 지워진 책등의 글자들처럼 흐릿했다. 그 흐릿함이 사람을 얼마나 따뜻하게 해주는지를 안다. 내게 한때는 그런 사랑이 있었다. 늦은 저녁 술집에서 그대가 날 두고 떠난 자리를 오래 바라보다가 거기서 날 바라보는 불빛 하나를 보았다. 그대 등 뒤에서 그대 가슴에 그늘을 만들던 그 불빛이었다. 내가 오래도록 그대를 지우지 못하는 흔적이 그 때문이다.
    낡은 책 한 권을 꺼내든다. 불빛이 금세 내게로 흘러든다. 둥글어진 모서리로 물방울처럼 고인 불빛들. 책을 펼치면 어느새 그 안에 가득한 불빛. 내 가슴 한켠에 저 불빛 같은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다.


    시·낭송_ 이승희 – 196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1997년에《시와사람》으로, 1999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가 있으며, 동시집 『달에게 편지를 써볼까』(공저)와 동화집 몇 권을 펴냈다. ‘서쪽’ 동인이다.
    출전_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 클릭『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문학동네)
    음악_ 권재욱
    애니메이션_ 강성진
    프로듀서_ 김태형

     


    이승희, 「아무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아도 혼자 말하고 빛을 뿜어내는 텔레비전 한 대가 있는 헌책방」을 배달하며


    헌책방에 자주 다녔습니다. 인천 배다리의 헌책방 거리에서부터 시작된 오랜 취미요 여행이었습니다. 제 삶의 지리와는 전혀 무관하던 동네인 남가좌동의 어떤 집, 신촌의 여기 저기, 인사동, 외대 앞의 그곳, 삼선시장 모퉁이 집 등등이 주로 다니던 책방입니다. 거반 사라지고 이제 몇 없습니다.

    거기 머무는 시간 동안 이백이나 가람이나 김수영이나 모두 이웃집 아저씨 같았고 예술이나 역사나 제각각 다정한 목소리로 흥성흥성했습니다(다행이랄까 쌤통이랄까 거기 처세술이니 경제니 하는 책들은 별반 없습니다). 세계는 다정스레 넓었고 깊고 그윽했으며 그 좁디좁은 통로는 한없이 즐거운 설렘의 여로였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던 일과 헌책방을 사랑하던 일이 겹으로 포개져 있는 시입니다. 헌책방은 그러고 보니 사랑을 닮았습니다. 그 옹색스러움이며 미로의 세계가 그렇습니다. 아득하고 빛 바래져가는 표지들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책들이 담고 있는 가없는 세계는 여전히 생생한 것이니 비록 지나간 것일망정 사랑이 그렇지 않던가요?

    알지 못할 사람의 메모가 남은 헌 책! 내 가슴에 메모를 남긴 그 사람! 흐린 불빛 속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