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토르소」(낭송 백익남)
이장욱, 「토르소」
손가락은 외로움을 위해 팔고
귀는 죄책감을 위해 팔았다.
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팔았으며
흰 치아는 한 번에 한 개씩
오해를 위해 팔았다.
나는 습관이 없고
냉혈한의 표정이 없고
옷걸이에 걸리지도 않는다.
누가 나를 입을 수 있나.
악수를 하거나
이어달리기는?
나는 열심히 트랙을 달렸다.
검은 서류가방을 든 채 중요한 협상을 진행하고
밤의 쇼윈도우에 서서 물끄러미
당신을 바라보았다.
악수는 할 수 없겠지만
이미 정해진 자세로
긴 목과
굳은 어깨로
당신이 밤의 상점을 지나갔다.
헤이,
내가 당신을 부르자 당신이 고개를 돌렸다.
캄캄하게 뚫린 당신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는 순간,
아마도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다.
아마도 내가
당신의 그림자였던 적이.
당신이 나의 손과
발목
그리고 얼굴이었던 적이.
■ 시_ 이장욱 - 1968년 서울 출생.
1994년 《현대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되었고, 2005년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제3회 문학수첩작가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도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소설집으로 『고백의 제왕』, 평론집으로 『혁명과 모더니즘』,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 이장욱의 현대시 읽기』 등이 있음.
■ 낭송 백익남 - 배우. 연극 <영원한 습관>, <예술하는 습관> 등에 출연.
■ 출전_ 『생년월일』(창비)
■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이장욱, 「토르소」를 배달하며
헤이, 누군가 나를 부릅니다. 돌아보자마자 순식간에 그를 알아보고 글썽,
눈물이 고였다면 그는 누구일까요. 헤이, 부르는 목소리 뒤에는 느낌표가
찍히지 않습니다. 무심한 듯 그저 쉼표 하나의 여백으로 부르는 그 목소리.
하지만 오랜 관찰자의 고독을 숨긴 채 시크한 무표정으로 오늘의 거리를
읊어가는 시인의 속내가 실은 몹시 여리고 따뜻하다는 것을 섬세한 독자들은
간파해냅니다. 토르소에게서 사라진 그 모든 각각 부위들의 역사를 기억하는
누군가 있어줘야 삶이 정당하지 않을까, 불현듯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비록
남루하거나 치욕의 기억에 근접한 것일 지라 해도. 헤이, 오늘의 거리에서 이런
목소리가 당신을 부르거든 외면하지 말고 뒤돌아봐주십시오. 내 손가락 귀 코
발목 팔목을 가진, 헤이, 우리는 언젠가 만난 적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것을 더 많이 가진 헤이, 헤이, 잿빛 토르소의 쓸쓸한 묵시록.
문학집배원 김선우 / 출처 :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