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홰

행복전도사 최윤희씨의 선택

cassia 2010. 10. 9. 07:30
 

    처음 기사를 보고는 행복전도사최윤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다니는 행복학 강사 최윤희씨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니,' 그것도 부부가 함께 드라마앤딩장면처럼, ...행복전도사가 했던 행복한 말을 모아 놓은 글이 있기에 가져왔습니다. 선택에 대하여, 이해가 되려고 합니다. 아니 이해가 됩니다. 끝까지 병마의 고통을 함께 해 준 남편,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두분, 가시는 곳에서는 아프지 마시고 행복하시기를,.... 우리, 사는 날까지 건강하십시다데먄혼저그냥힌소리하는겁니다 

     

    “인생은 생방송! NG도 리허설도 없다. 딱 한번 뿐인 인생이기에 대충대충~ 적당히~ 살 수는 결단코 없다! 까짓 것, 절망 쯤이야 희망으로 뒤집어버리면 그만이다!” (이래 놓고, 하지만 병마는 뒤집기가 힘들었겠지요.)

     

    하루를 48시간처럼, 일주일을 8일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행복학 강사 최윤희 씨가 외치고 다니는 말이다.

     

    겁 많고, 부끄럼 많고, 눈물 많은 최윤희 씨는 서른여덟 살까지 100퍼센트 순수한 완전 무공해 전업주부였지만 남편의 갑작스런 사업 실패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하는 카피라이터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그녀, 여성에게 지극히 폐쇄적인 대기업에서 남다른 소박함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웃음 많고, 용기 많고, 친구 많은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청와대에서 교도소까지, 룸살롱 여종업원에서 벤처 CEO, 대학생, 주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을 아우르며, 이 시대의 행복학을 강의한다.

    몸소 인생역전을 보여준 행복 바이러스, 최윤희 씨를 5월 3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다.

     

    ◇ 초록 바탕에 빨간 브릿지, 독특한 아이디어로 승부

    ▶ 다른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특별함이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일단 제 외모가 굉장한 도움을 줘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꽃미남 꽃미녀 앞에서는 환심을 사려고 긴장을 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저는 걸어다니는 가스통이잖아요. 긴장을 풀고 가슴을 쫙 펴고 자기의 흉을 다 봐요. 이상하게도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이 “윤희야, 너만 알고 있어.” 하면서 자기 속내를 다 내보여요. 그러니 어릴 때부터 얼마나 힘들었겠어요.(웃음) 지금도 아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모르는 사람들까지 매일 수십 통의 편지와 상담을 통해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놔요. 제가 그 덕분에 강의도 하고 방송도 하는데 어릴 때 싫었던 외모가 지금은 너무 감사합니다.

     

    ▶ 외모가 어때서 그러세요.

    커야할 데는 작고 작아야 할 데는 크고 제 멋대로 생겼잖아요. 저 스스로 삼종혼합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엉겅퀴, 씀바귀, 고들빼기. 하지만 이런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바꿔버리는 거죠. 지금은 개성시대잖아요. 생긴 게 무슨 죄에요. 못생긴 거, 가난한 거, 무식한 거 죄 아니에요. 저는 죄는 딱 하나라고 생각해요. 열심히 안 사는 죄에요.

     

    ▶ 머리색깔을 바꾸셨어요?

    지금도 바탕은 초록에 변함은 없고 브릿지만 빨간색으로 2개를 넣었어요. 왜 2개인가 하면 초록색은 축구를 너무 좋아해서 박주영, 박지성, 차두리가 와서 공차라고 잔디밭을 깔았고요, 양쪽에 넣은 빨간 브릿지는 우리나라 경제가 너무 새빨갛기 때문에 경계경보 울리고 다니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저의 차별화 전략을 세운 거죠.

     

    ▶ 굉장히 잘 어울리시는데요.

    제가 직접 했어요. 파출부로도 안 써줄 나이에 매일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귀가해요. 벽돌공장에 가도 쫓겨날 나이인데 아직까지 저를 사용하겠다고 난리에요. 컨설팅 회사에서 저를 잡으려면 3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해요. 그러다보니 미장원에서 안 기다려 주잖아요. 그래서 제가 가방에 가위를 넣고 다니면서 시간 있을 때마다 자르다 보니 특이하게 잘랐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뒷머리는 어떻게 자르는지 물어봐요. 뒷머리는 잡아당기면서 자르면 돼요. 제가 하는 걸 보고 아파트의 주부 몇 사람이 따라 해요. 자기 마음대로 하니까 너무 재미있더라는 거예요. 돈이 일단 안 들고 안 기다려도 되잖아요.

     

    ▶ 정말 특이하신데, 빨간 넥타이는 뭔가요?

    저는 비싼 옷을 절대 못 입는데 친구들을 보면 명품 옷 때문에 조심하느라고 자유를 잃어요. 일산에 길거리에 가면 싸구려 옷을 3천원이면 사거든요. 넥타이는 중국제인데 인터넷에 주문하면 1만원에 4개를 줘요. 하나에 2,500원이잖아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색깔인데 해 봤고 넥타이를 그냥 매면 답답하기 때문에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 쭈욱 내려봤어요. 이렇게 저만의 아이디어로 코디를 하는데 사람들은 따로 코디가 있냐고 물어봐요. 코디는 물론 매니저도 없어서 아직까지는 제가 다 하는데 적은 돈으로 개성적으로, 특이하게 하는 거죠.

     

    ◇ 주 8일, 하루 14시간, 마음대로 늘어나는 고무줄 스케줄

    ▶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사시는데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세요?

    얼마 전에 TV에도 제 수첩이 공개가 되었는데 굉장히 빽빽해요. 기상시간은 새벽 3시~3시 반 사이에 일어나고 물론 전날 밤 9시 경에 잠들어요. 새벽 4시~6시까지는 일산에 있는 정발산에 가서 운동을 해요. 작은 산이라고 지인들은 웃고 마는데 그 산도 안 올라가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곳이 해발 70m정도인데 저에게는 딱 좋아요. 그 작은 산에도 ‘깔딱 고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편안한 길로 가는데 저는 깔딱 고개까지 끝까지 올라가요. 그러면 유산소 운동이 얼마나 되는데요. 그러고 나서 일과를 시작하는데, 주 8일제라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하루 8시간을 근무하는데 저는 14시간을 일을 합니다. 강의가 하루 기본이 2개가 잡히고 일요일은 가족들과 함께 영화 보는 날인데 어쩔 수 없이 강의를 하러 가는 일도 생겨요. 지난번에도 청주의 로터리클럽 회원들 2천명을 모아놓고 강의를 했어요. 피치 못 할 때는 3~4개까지도 하고요. 그밖에도 TV, 라디오 등 방송에도 출연하다 보니 다른 사람과 똑같은 하루 24시간의 일과가 고무줄처럼 늘어나게 되는 거죠. 게을러터진 사람한테는 10시간도 안돼요. 저도 옛날에는 그랬어요. 38세까지는 전업주부였잖아요. 매일 집에서 누워만 있으니까 우울증만 걸리더라고요. 지금은 이렇게 바쁘게 사니까 우울증 걸릴 시간이 없고 더 활기찬 것 같아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는 최근 개봉영화도 다 보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바쁜데 어떻게 영화를 다 보냐고 하는데 아까 일요일을 가족과 함께 영화 보는 날로 정했다고 말씀드렸는데, 아침 9시 조조부터 영화를 보면 하루 4편을 연달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최근 개봉한 영화들은 거의 빠짐없이 챙겨봤어요. 바빠서 책 못 읽고, 영화 못 보는 것은 게으르다는 핑계에요.

     

    ▶ 가족은 어떻게 되세요?

    남편과 아들, 딸 이렇게 넷입니다. 딸은 결혼해서 미국 시애틀에 살고 있고 지금 아들과 셋이 살고 있는데 저희 집은 밥을 잘 안 해줘서 명이 긴 사람들만 살아남아요. 다행히 요즘은 전국에 강의를 다니니까 온갖 종류의 김치들, 갓김치, 열무김치, 백김치, 보쌈김치 등을 비롯해서 하동시장님이 보내주신 배, 곡성에서 온 메론, 또 충주에서는 사과를 보내주셔서 완전히 불우이웃돕기로 살고 있어요.(웃음) 너무 감사해요. 현재는 돈도 많이 받고 다니는데 바쁜 시간을 소화하려다 보니까 강의는 렌트카로 보내줘요. 제가 운전을 못해요. 보통 다닐 때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데 제 가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노숙자 컨셉이잖아요. 생수통을 넣어가지고 다녀야 하니까 가방이 무거워요. 지금은 돈을 버니까 모범택시를 탈수도 있고 기사를 둘 수도 있지만 첫 마음가짐을 잊지 않으려고 아직도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어요. 노숙자 차림을 하고 손잡이를 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 사람들이 신기한가 봐요. “어머~선생님, 버스 타세요.” “선생님, 전철도 타시네요.” 얘기하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이런 걸 좋아해요.

     

    ▶ 자리는 잘 비켜주나요? 
    안 비켜주죠. 그리고 비켜주는 걸 못 참아요. 제가 자리가 있으면 앉는 거고 없으면 서서 가는 거지, 남의 자리를 어떻게 뺏어요. 전 그런 건 못합니다.

     

    ▶ 최윤희 선생님의 강의를 한번 듣고 싶은데요.

    손숙 선생님은 듣지 않으셔도 됩니다.(웃음) 사회자가 저를 명강사라고 소개하면 제가 마이크를 뺏어서 ‘멍강사’라고 소개를 해요. 멍청한 강사라는 뜻인데 제 강의의 가장 큰 특징은 지금 앵콜 강의가 많은 이유가 한 번 들은 사람이 계속 추천을 한다고 해요. 그래서 추천을 받아서 전화가 오면 저는 정말 강의를 못하니까 그런 유언비어에 속지 말라고 그래요. 그런데 저의 특장점이 뭐냐 하면 저를 보고 용기와 희망을 가져요. 저런 여자도 사는데 우리가 왜 못 살겠는가 생각하는 거예요. 유식하고 잘난 사람이 와서 강의를 하면 저 사람은 잘났으니까, 나하고는 다른 사람이니까 하고 주눅이 드는데 저는 제 모든 비리를 다 이야기하거든요. 실수담이나 못난 부분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사람들이 행복해 하면서 저런 사람도 열심히 사는데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용기와 희망을 얻는 거죠. 그리고 그런 실수담을 통해서 저도 스트레스가 해소가 되는 거예요. 고해성사를 하듯이. 사람들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보는데 하나도 힘들 게 없어요. 나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주변에 만난 따뜻한 사람들 이야기를 전해주니까요.

     

    ◇ ‘명강사?’ No! ‘멍강사’가 전하는 생생한 삶의 기록

    ▶ 고해성사라고 하셨는데 주로 자신의 어떤 것들을 이야기하시나요?

    살면서 얼마나 바보 같은 짓들을 많이 하고 사는지 몰라요. 회사에서도 버벅거려서 사람들한테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슬프게 화장실 가서 울고 지금도 지하철을 타면 방향을 잘 몰라서 30분쯤 지난 후에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일 등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어요.

     

    ▶ 그런 솔직함이 최대의 강점이신데 사람 사귀는데 있어서 귀재에요. 어떤 친구들을 사귀시는지 궁금한데요.

    조용남씨, 한비야씨, 이용식씨, 최백호씨, 이 용씨 등 연예인들도 많고 유명하지 않은 일반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정말 좋아해요. 특히 바닥에서 돗자리 깔아놓고 파시는 할머니랑 가장 친한데 저는 그분들한테 정말 다가가고 싶어요. 아파트 근처에 노점상처럼 바닥에 돗자리 깔아놓고 하루 종일 도라지 껍질 까고 파 껍질 까는 할머니한테 가서 쭈그리고 앉아서 말을 거는 거예요. 그러면 시비를 걸어요. 한 바구니에 3천원이거든요.“할머니, 이렇게 파시면 안 되죠. 그렇게 힘들 게 까시는데 3천원만 받으시면 안돼요.” 그러면 “이문이 안 남아도 많이만 사가면 좋제.” “할머니, 자제분들은 어디에 계세요?” “아이고~고것들은 1년에 2번 보면 다행이여.” “할아버지는 살아계세요?” “영감은 세상 떠난지 오래됐어.” 그러면 가슴이 아프잖아요. “할머니, 아프시면 어떡해요?” “사는 게 별 건가? 다 그런 거지. 내가 기어서라도 벌어서 먹어야지.” 도라지 껍질을 매일 까니까 손톱이 없고 다 갈라졌어요. 그런 손이 위대하잖아요. 할머니 손이 예쁘니까 잡아봐야지 하면서 꼭 끝에는 돈을 물어보거든요. “3천원 팔면 얼마나 남으세요?” “그런 걸 알면 내가 이런 걸 하겠어? 3천원이면 내가 열흘을 사는 돈이여.” 3천원이 얼마나 큰 돈인가 칼럼도 썼었어요.

    창원에서 강의를 하러 내려갔을 때 택시 기사를 만났어요. 깍두기 머리를 하고 남자 옷을 입었는데 아줌마더라고요. 제가 또 여쭤봤죠. “기사님, 아줌마에요? 아저씨에요?” 그분 대답이 아주 멋있었어요. “지는요, 경우에 따라서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됩니더.” 승객들이 술 먹고 집적댈까봐 자기를 보호하고 다니는 거예요. 제가 호기심의 천재라서 미니 인터뷰를 했죠.남편 사업이 실패를 한 지 3년 됐대요. 아이가 셋, 다섯 식구에요. 서울은 이틀 일하고 하루 쉬잖아요. 그런데 창원은 일요일만 쉬고 날마다 운전 한대요.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14시간 동안 일을 해요. 택시 기사들이 얼마나 힘들어요. 화장실 제때 못가고 밥 제때 못 먹고 별의별 승객을 다 이겨내야 하죠. 그 힘든 중노동을 14시간 동안 하고 꼭 끝에 가서는 돈을 물어봐요. “한 달에 얼마 받는가 하면 들으시면 깜짝 놀랄 깁니더.” 한달 60만원에서 의료보험 등을 제외하면 50만원을 가져간다고 해서 정말 놀랐어요. “50만원에 다섯 식구는 힘들지 않으세요?” 그분 대답이 짱이에요. “어떤 사람은예, 한달에 5천만원 갖고도 몬사는 사람이 있고예, 어떤 사람은 50만원 갖고도 잘 사는 사람이 있습니더. 저희 가족이 쪼메 힘들어도 씩씩하게 살고 있습니더.”그분들이 스승이에요. 우리들의 인생 교과서에요. 사람들은 포털사이트 같아서 어디를 클릭해도 신기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잖아요. 인간다큐, 휴먼드라마가 TV에서만 하는 게 아니에요.

     

    ▶ 일본인 친구도 있어요?

    광화문에서 강의 끝나고 남는 시간에 집에 가기는 시간이 어중간해서 경복궁 앞에 있는 돌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청년 2명이 와서 한국말로 앉아도 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돌한테 앉아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앉으래요, 앉으세요.” 앉더니 일본말을 하는 거예요. 일본 사람이냐고 물어봤더니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한국어를 배우러 온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곧바로 인터뷰를 하고 명함 주고받고 헤어졌어요. 그런데 며칠 후에 이메일이 왔는데 내 책이 교보에 있는 걸 보고 반갑더래요. 이름이 히로시인데 뮤직엔지니어에요. 그래서 친구가 되었는데 지금은 미국에 유학을 가 있어요. 아직은 한국말이 서툴러서 여름방학에 올 텐데 “윤희씨, 윤희씨를 만날 생각에 빠딱빠딱 뛰어요.” 지금도 이메일이 와요. 우리 가족도 소개시켜 주었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지금 나이에 29살의 청년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재미있어요.

     

    ◇ 톡톡한 대가 치른 결혼 세금

    ▶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22살 그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23살에 엄마가 됐어요. 제가 생각해도 굉장히 파격적인 여자인 것 같아요. 37년 전에 제가 남자를 찍어가지고 결혼했어요. 이화여대를 다닐 때 학교 교지 편집장이었는데 교지를 코리아 헤럴드에서 만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각 학교 편집장들이 그곳에 다 와서 책을 만들었죠. 믿지 않으시겠지만 서울대, 연대, 고대 각 편집장들이 저에게 프러포즈를 했어요. 말수도 적은데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셔서 우울증도 있었고 또 가난하니까 매일 까만 색 옷만 입었는데 그게 남학생들 눈에는 신비스럽게 보였던 모양이에요. 그런 와중에 제 눈에 들어온 남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제가 소설을 많이 읽다보니까 허상을 부여한 거예요. 왠지 하숙생일 것 같은 그 남학생의 양말을 빨아주고 싶다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어요. 소설을 쓴 거죠. 오히려 제가 더 그 남자를 좋아하고 그 남자는 착하니까 저를 피했어요. 왜냐하면 남자의 조건이 최악이었거든요. 집안은 자자손손 가난하고 나이는 9살이 많고 고등학교 졸업이었는데 돈을 벌어서 야간대학교를 다닌 거예요. 당시에 저는 이화여대 편집장에다 학생회 임원으로 그야말로 잘 나갔죠. 그런데 제가 무인도로 도망가자는 둥, 그렇게 해서 결혼을 한 거예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우수에 찬 모습으로 담배를 피던 모습에 반해서 결혼했는데 나중에는 너무 말수가 없어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미치겠더라고요.(웃음)자존심이 있지 제가 선택한 거잖아요. 그리고 재활용 시대에, 신문지도 다시 활용해서 쓰잖아요. TV도 고장 나면 고쳐서 쓰잖아요. 하물며 평생을 함께 살겠다고 맹세한 배우자인데 고쳐가면서 써야죠. 그런데 상대부터 고치려고 하면 절대 안돼요. 화살표는 항상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그래서 제가 말을 해 버린 거예요. 둘 다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숨이 막혀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제가 먼저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재미있더라고요. 말을 하면 노폐물이 빠져나가잖아요. 더욱이 38살에 카피라이터로 광고회사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카피라이터는 말을 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직업이에요. 그래서 제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고 또 늘더라고요.

     

    ▶ 경제적으로는 어떠셨어요?

    남편의 고독함을 나의 온정으로 채우겠다는 가당치 않은 열망에 결혼을 하기는 했는데 그 선택한 대가로 치러야 할 세금이 굉장히 많았어요. 정말 고생 많이 했거든요. 가난을 견디면서 결혼 8년 만에 산꼭대기 아파트 10평짜리 집을 마련했어요. 그런데 평생 가져보지 못한 것을 갖게 되니까 남편이 집을 담보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두 달 만에 알거지가 돼버렸죠. 남편이 내일 당장 집을 비워야 한다고 얼굴이 까매져서 들어왔더라고요.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저에게 닥친 거예요.그래서 마음속으로 시험문제를 내 봤어요. ‘주관식은 너무 가혹하니까 객관식으로 하나만 찍어라. 1번, 이혼해라. 2번, 가족동반 자살을 해라. 3번, 인생 타락을 해라. 4번, 새 출발해라.’ 이혼을 하려고 보니까 동사무소를 거쳐서 구청, 법원까지 한 번에 처리되지 않고 굉장히 복잡하더라고요. 그래서 1번은 접었어요. 2번이 제일 하고 싶었어요. 당장 갈 곳이 없으니까 가족동반 자살을 하려고 밖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렀어요. 그랬더니 재미있게 친구들과 너무 잘 놀고 있는 아이들을 동반 자살시킬 수 없어서 2번도 접었어요. 3번, 타락을 해라, 제 외모를 보세요. 타락이 가능한 외모에요? 그러고 나서 보니까 4번 새 출발하는 것밖에 안 남았더라고요.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사람 마음처럼 간사한 것이 없구나, 사람 마음처럼 위대한 것이 없구나, 사람 마음처럼 신비한 것이 없다는 거였어요.

     

    ◇ ‘경쟁률 1330:1’ 희망의 버튼을 눌러라

    ▶ 말이 쉬워서 새 출발이지, 그런 상황을 어떻게 극복을 하셨어요?

    집을 비워줘야 하니까 일단 아이들의 교육적금을 깼어요. 70만 2400원, 지금 돈으로 하면 1200만원 정도 되는 돈인데 그 돈을 가지고 부산으로 갔어요. 왜 부산이었냐 하면 우리나라가 6.25전쟁 났을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잖아요. 현재 우리 가정이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된 것과 똑같다고 생각을 한 거죠. 내려가서 쪽방을 얻어서 1년 동안 주인 집 아줌마 때문에 돈 못 받는 파출부 노릇을 하며 살았어요.주인 집 아줌마는 매일 밤 화투를 쳤는데 얼마나 팔다리가 저리고 아프겠어요. 밤마다 에구에구 아픈 소리를 치는데 애들이 깰까봐 재빨리 가서 주인집 아줌마 팔다리 주물러주고 했어요! 그 방도 나가랄까봐 조마조마한 거죠.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어느 날, 모 기업에서 주부사원 모집광고를 신문에서 보고 응모를 했어요. 1330명의 응모자 가운데 저 혼자 뽑혀서 카피라이터를 하게 된 거예요. 제가 시험을 잘 봐서 뽑힌 게 아니고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파격적으로 제 프로필을 소개했어요. 하얀 종이에 출생, 성격, 지원 동기 등을 쓰도록 되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쓰는 것처럼 일률적으로 쓰지 않고 처음부터 반말로 썼어요. ‘애꾸눈인 임금이 자기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정직한 화가는 애꾸눈을 그대로 그렸고 아첨꾼 화가는 두 눈을 성하게 그렸다. 하지만 임금은 그 그림들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이때 어떤 사람이 그려보겠노라고 해서 그린 그림을 보고 임금은 크게 만족하며 기뻐했다. 성한 눈을 한 옆모습을 그린 초상화였다. 인생도 이와 같이 행복과 불행이 함께 있다. 나도 이 사람처럼 좋은 쪽으로 보고 살고 싶다. 귀사에서 나를 뽑아준다면 최선을 다해 일할 것이고 떨어진다고 해도 귀사의 번영을 빌겠다.’ 이렇게 썼어요. 딱 한 명 카피라이터로 제가 뽑혔고 서울로 올라와서 직장을 다니게 되었어요. 희망, 취미, 특기도 특이하게 썼어요. 보통 피아노, 독서를 쓰잖아요. 그런데 솔직하게 쓰는 게 제일 편하겠더라고요. ‘특기, 멍하니 하늘 쳐다보기, 바람 맞으며 무작정 걷기. 취미, 인상 쓰고 있는 사람 겨드랑이 간지럽히기.’ 그 당시에 완전히 튀어버린 거예요.

     

    ▶ 그 회사에서도 보는 안목이 있었던 거네요.

    그런데 뽑히면 뭐합니까. 카피라이터라는 것은 CF(광고)의 말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 CF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을 해야 해요. 백합처럼 청초한 신입사원을 기대했는데 중고품, 폐차직전의 나이 40이 다 된, 더구나 지금처럼 여자도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던 23년 전의 유부녀는 회사를 다닐 수도 없던 상황이었는데 제가 들어가니까 전 직원이 난리가 난 거예요. 그때부터 왕따에 구박에 설움에.. 정말 화장실 가서 많이 울었어요. 여자라는 것, 미인이 아니라는 것, 결혼했다는 것 이 세 가지 악조건 속에서 일을 했는데 어떻게 극복했냐 하면 여자이기 때문에 2배, 3배 더 열심히 일을 함으로써 극복했어요. 그리고 미인이 아닌 것은 여자는 더 이상 화초가 아닌 꼭 필요한 약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극복했고 마지막 결혼한 점은 동료들의 상담을 하는 것으로 필요한 장점으로 바꾸어 놓았죠. 한 6개월쯤 지나고 나니까 곁에 오지도 않던 사람들이 서로 번호표를 들고 순번을 정해서 올 정도로 절친해졌어요. 지금도 만나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이야기를 해요.

     

    ▶ 그런데 왜 회사를 그만두셨어요? 
    1997년 IMF 때 제가 국장이었는데 부하 직원들 중에서 30%가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부하 직원들이 인사를 하러 다니는데 막 눈물이 나는 거예요. 회사가 경영이 어려우니까 저도 언젠가 회사를 나오게 될 텐데 제가 나오면 젊은 직원들 3명이 다닐 수 있잖아요. 그래서 회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98년 1월에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왔는데 그때 나이가 52살이었어요. 그런데 회사에서 없으면 안 되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굉장히 저를 잡으려고 애썼어요. 당시 상황이 여자부터 해고하던 시기였는데 52살에 뭘 시작할 수 있겠어요. 제 꿈이 봉사활동을 하는 거니까 책도 쓰고 봉사도 하면 되겠다 했는데 지금 강의도 나가고 아직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 회사를 그만두고 강의를 시작하신 거로군요.

    처음부터 강의를 시작한 건 아니었고 ‘행복, 그거 얼마에요’라는 책을 썼어요. IMF때 무너진 가정들을 여자가 일으켜 세운 사례들을 모아서 출간했는데 TV에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출판사에서도 책 홍보를 위해 나가야 한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나갔어요. 그리고 나갈 때 분수도 모르고 화장하는 거 싫으니까 맨 얼굴로 나간다고 했어요. PD가 순수하니까 그대로 하라고 해서 맨 얼굴로 나갔잖아요. 99년 10월 14일, 증거자료도 있어요. 그런데 바로 이게 제 인생을 바꿔놓을 줄 몰랐죠.TV출연 이후 여느 개그맨보다 더 재미있다는 소문이 방송 PD와 작가들 사이에 퍼진 거예요. 그때부터 방송에 나가고 강의도 하게 된 거였어요. 완전히 인생역전이에요.

     

    ▶ 첫 월급 타시던 날, 남편에게 공로패를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떤 내용이에요?

    남편이 사업에 실패를 하지 않았다면 저는 아직도 전업주부로 살고 있을 거잖아요. 그때는 힘들었지만 사회생활을 하게 해준 남편이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그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너무 예뻐요. 그래서 감사장을 매일 줘요. “귀하는 사업에 실패해서 거지가 됨으로써 인간 최윤희의 인생을 완전히 뒤집힐 기회를 줬으므로 그 공을 높이 사서 상장을 수여함.” 지금도 공로패를 남편이 갖고 있어요.(웃음) 지금도 남편을 쳐다보면서 자기는 욘사마보다도 더 멋있다고 얘기해요.(웃음)

     

    ▶ 남편은 많이 달라지셨나요?

    많이 달라졌죠. 물론 달라져봤자 거기서 거기지만 그래도 표현은 조금씩은 해요. 크레파스 12색보다는 328가지 색이 훨씬 재미있다는 것을 아니까 말을 하기는 하는데 아직도 보통 사람 수준은 안됐어요.

     

    ◇ 행복백서의 결정판! “당당하게 웃으세요”

    ▶ 지금은 이렇게 웃으면서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지만 정말 힘들고 가슴 아플 때가 있으실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제가 전국에 강의를 다니면서 ‘행복~행복~’하니까 24시간 행복한 줄 알아요. 제가 머리에 꽃 꽂은 것도 아니고 행복 체인점도 아닌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다만 열 번 슬플 것을 아홉 번으로 줄이고, 일곱 번 짜증나는 것을 여섯 번으로 줄이는 피나는 훈련을 하는 거죠.저도 슬플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저만의 노하우가 있어요. 전 세계의 힘 센 구호들을 불러오는 거예요. ‘얍!’ ‘으랏차차!’ ‘아자아자!’ ‘으쌰으쌰 파이팅!!’ 이렇게 스스로 최면을 거는 데 20번만 해 보면 행복에너지가 온 몸에 퍼져요. 그리고 우리가 슬픈 이유는 남과 비교하기 때문이고 없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을 생각해서 사고의 전환을 빨리 회전시키는 거죠. 쉽지 않지만 생각보다 해 보면 쉽습니다.

     

    ▶ 자녀분들은 어떻게 키우셨어요?

    아이들은 완전히 자유방임주의로 키웠어요. 제가 얼마나 ‘엽기 엄마’인가 하면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을 데리고 김밥을 싸 들고 영화 4편을 보러 다녔어요. 지금처럼 영화관이 멀티 플랙스가 아니라서 대한극장에서 보고 스카라 극장으로 향하려면 이동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시간표를 효율적으로 잘 짜지 않으면 4편을 다 못 보거든요. 그러면 김밥 2줄을 싸 가지고 보러 다녔어요. 지금도 아이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오히려 아들은 엄마 같은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하고 우리 딸은 엄마는 딱 자기 타입이래요.(웃음) 정말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뒀어요. 덕분에 모든 가족이 영화 마니아가 되었어요.

    저희는 엽기 가족이라서 영화관에 못 갈 때는 넷이 앉아서 비디오를 9편을 봐요. 영화 한 편 끝나면 화장실 얼른 다녀오고, 먹으면서 보는데 영화에서만큼은 모든 가족이 일치합니다. 영화를 다들 좋아해요.

     

    ▶ 지금 불행을 느끼고 계신 분들에게 행복해지는 방법 하나만 가르쳐 주시겠어요?

    행복은 셀프(self)에요. 우리가 셀프 점에 앉아있으면 물 한잔 안 갖다 주잖아요. 행복은 내가 찾는 거예요. 가끔 착각을 하는데 행복은 로또 복권이 당첨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뭘 해줘야 행복한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꽃등심을 먹고 럭셔리 아파트에 살아도 징징 짜고 살면 불행한 것이고 돼지껍질을 먹고 단칸방에 살아도 하하하 웃으면 행복한 거니까 그냥 웃으세요

 

'바람의 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정  (0) 2011.03.26
[스크랩] 차가웠겠다....  (0) 2010.12.10
rain  (0) 2010.06.19
소리를 따라가다,...  (0) 2010.05.31
[스크랩] White Day..^^*  (0) 2010.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