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스크랩] "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김종해 시인

cassia 2008. 5. 22. 05:42


♩Pale Blue Eyes
- Velvet Under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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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
     - 나는 이런 시가 좋다

  나는 이런 시가 좋다.
  아침에 짤막한 시 한 줄을 읽었는데, 하루종일 방안에 그 향기가 남아 있는 시.
  사람의 온기가 담겨 있는 따뜻한 시.
  영혼의 갈증을 축여주는 생수 같은 시.
  눈물이나 이슬이 묻어 있는 듯한, 물기 있는 서정시를 나를 좋아한다.
  때로는 핍박받는 자의 숨소리, 때로는 칼날 같은 목소리,
  노동의 새벽이 들어 있는 시를 나는 좋아한다.
  고통스러운 삶의 한철을 지내는 동안 떫은 물 다 빠지고
  시인의 마음 안에서 열매처럼 익은 시.
  너무 압축되고 함축되다가 옆구리가 터진 시.
  그래서 엉뚱하고 다양한 의미로 보이기까지 하는 선시禪詩 같은 시.
  뿌리와 줄기도 각기 다르고, 빛깔과 향기도 다르지만,
  최상의 성취를 꽃으로 빚어내는 하느님의 시.
  삶의 일상에서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있다가
  세상사의 중심을 시로써만 짚어내는 시인의 시.
  시로써 사람을 느끼며,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하고 싶은 시.
  울림이 있는 시, 향기 있는 시.
  나는 이런 시가 정말 좋다.


.....................................................................이천일년 늦여름에
.................................................................................김 종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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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 김종해 시인 -



따스한 것은 빨리 증발한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까
나의 동무들은 모두 떠나고
나 혼자 남아 있다
외로워지니까 추억이 그 자리를 넓힌다
내 안에서 인기척을 내는 것은
무인도뿐이다
저 혼자 바위가 되거나
바람이 되는 것이다
하루치의 미세량!
무인도에선
그리운 사람의 이름만
파도소리를 내고 있다.


 #
   김종해 시집(문학세계사)
  "풀" 가운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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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의 뿌리
          - 작품해설 부분,


...................................................- 신경림(시인) -



  김종해의 새시집〈풀〉은 한마디로 詩를 읽는 즐거움을 만끽시켜 준다. 사람들은 왜 시를 읽을까. 나는 종종 이 문제를 생각해 보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 아무리 그 내용이 훌륭한 것이라 하더라도 詩를 읽는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詩라면 읽지 않는다. 어떤 詩가 어떻게 즐거움을 주는가를 따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은 산문이나 그밖의 사회과학이 주는 즐거움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김종해 시인의 이번 시집의 詩들은 이런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김종해의 시집〈풀〉에 실린 詩들은 전체적으로 아름답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넉넉하고 따뜻하다.



....- 동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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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떠나리라"


................................- 김종해 시인 -



바람부는 날 떠나리라
흰 갓모자를 쓰고 바삐 가는 가을
궐闕 안에서 나뭇잎은 눈처럼 흩날리고
누군가 폐문에 전생애를 못질하고 있다
짐朕의 뜻에 따라
가야금 줄 사이로 빠져나온 바람은 차고
눈물이 맺혀 있다
떠나야 할 때를 알면서
짐朕이 이곳에 머뭇거리는 것은
아직 사랑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 그리워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이 가는 길을 탓하지 않으며
손금 사이로 흐르는 일생을 퍼담는다
슬픔이 있을 것 같은 날을 가려
이 가을에는 떠나리라



 - 동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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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우산"


.............................- 김종해 시인 -



비를 가리기 위해 우산을 펴면
빗방울 같은 서정시 같은 우산 속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은 우리들 우산 안에 들어와 있다
잠시 접혀 있는 우리들의 사랑 같은
우산을 펴면
우산 안에서 우리는 서로 젖지 않기
외로움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서로 젖지 않기

물결 위로 혹은 꿈 위로 얕게 튀어오르는
빗방울 같은 우리 시대의 사랑법 같은
우산을 받쳐 들고
비오는 날 우산 안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가기
비는 내려서 우리의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로 흘러가지만
정작 젖는 것은 우리들의 여린 마음이다
우산 하나로 이 빗속에서
무엇을 가리랴
젖지 않는 꿈, 젖지 않는 희망을
누가 간직하랴

비를 가리기 위해 우산을 펴면
물방울 같은 서정시 같은 우산 속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은 우산만큼 작아져서 정답다
아직 우리에게 사랑이 남아 있는 한
한번도 꺼내 쓰지 않은
하늘 같은 우산 하나
누구에게나 있다



 - 동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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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 밭"


.......................- 김종해 시인 -



내가 뿌린 씨앗들이 한여름 텃밭에서 자란다
새로 입적한 나의 가족들이다
상추 고추 가지 호박 딸기 토마토 옥수수 등의
이름 앞에 김씨 성을 달아준다
김상추ㆍ김고추ㆍ김가지ㆍ김호박ㆍ김딸기......
호미를 쥔 가장의 마음은 뿌듯하다
내 몸 잎사귀 가장자리마다 땀방울이 맺힌다
흙 속에 몸을 비끄러매고 세상을 훔쳐보는 눈,
잡초의 이름 앞에도 김씨 성을 달아준다
잡초를 뽑아내는 내 손이 멈칫거린다
김잡초, 그러나 나는 단호하다
늘어나는 식구들 때문에 가장은 바쁘다
흙의 뜻을 하늘에 감아올리는 가장은 바쁘다
오늘은 아버지께 한나절 햇빛을 더 달라고 한다
목마른 내 가족들에게 한 소나기 퍼부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아아, 살아 있는 날의 기도여!



 - 동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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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품"


.......................- 김종해 시인 -



그대에게서
반품이 되어 돌아온 내 시詩를
오늘은 작두날로 썰어
파지로 버린다
전에는 국판 크기였는데
오늘은 탈색된 B6판 크기의
쓸모없는 세상의 한쪽에 비켜서서
작두날마저 먹지 못하는
파지로 버린다
몇 대의 트럭에 실려
파지공장으로 떠나는
저 낯익은 얼굴!
그 트럭 위에
오늘은 내가 반품으로 앉아 있다



 - 동시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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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5060 그집앞헌책방 예동(霓童)
글쓴이 : 데미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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