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cassia 2008. 3. 8. 18:18

왕가위가 찍으면 키스도 예술…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사랑은 문을 여닫는 일, 아닐까.

어떤 문은 꼭 닫혀 있고, 어떤 문은 많은 이들에게 열려있고, 또 어떤 이는 열쇠뭉치를 들고 이문 저문 들락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한 사람이 가진 것이 일반적인 사랑이다.

그러면 헤어진 후 열쇠를 어떻게 할까. 왕가위 감독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주인을 잃어버린 열쇠를 처럼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을 그린 사랑이야기다.

 

 

아픈 이별을 경험한 엘리자베스(노라 존스)는 열쇠를 들고 카페에 들른다. 카페 주인 제레미(주드 로)에게 열쇠를 맡기며 헤어진 그 사람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그 카페에는 이미 열쇠가 블루베리 병에 한 가득이다.

그가 만들어주는 블루베리 파이를 먹으며 조금씩 상처를 잊어가던 그녀는 실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훌쩍 여행을 떠난다. 떠난 후 제레미는 깨닫는다. 이미 자신의 문이 엘리자베스에게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는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 냅킨을 정갈하게 깔아놓고 먼 여행을 떠난 그녀를 기다린다.

 

 

 

‘중경삼림’(1995년)에서 실연당한 후 “너는 왜 그렇게 우울하니, 그만 울어”라며 젖은 수건을 짜던 양조위의 혼잣말이 떠오른다. 이별의 아픔을 대하는 왕가위의 시선은 여전하다. 감각적인 영상에, 또 지극히 감각적인 음악을 더해 슬픈 실연의 아픔을 어루만진다.

다르다면 중국 반환을 앞둔 홍콩의 뒷거리를 음울하게 그린 ‘중경삼림’과 달리 이 영화는 스산한 대륙, 미국의 풍경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미국판 ‘중경삼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난해 칸영화제 개막작이었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가위가 주드 로, 노라 존스, 레이첼 와이스, 나탈리 포트먼 등을 데리고 미국에서 찍은 첫 장편이다.

뉴욕 뒷골목의 오래된 카페, 황량한 사막의 도로, 바람에 출렁이는 신호등, 을씨년스러운 창밖 풍경 등 왕가위식 영상이 전편을 흐른다. 카메라 감독이 크리스토퍼 도일에서 다리우스 콘지로 바뀌었지만 스타일은 왕가위의 입김이 물씬 녹아들었다. 주인공들의 다친 기억을 그리듯 거친 입자에 궤적을 남기는 식의 영상처리도 여전하다.

 

 

한 가지 도드라지는 것이 있다면 음악이다.

주인공이 바로 노라 존스다. 그녀는 ‘그래미의 여왕’으로 한국에서도 공연했던 팝 가수다. 특히 오프닝을 장식하는 ‘The Story'는 블루베리 파이처럼 감미로운 곡이다. 느릿느릿 울리는 드럼과 그 위에 덧댄 피아노, 그리고 아이스크림처럼 가슴에 스며드는 노라 존스의 달콤한 노래는 이 영화의 절절한 주제곡이다.

크랭크인에 들어가기 전 왕가위는 노라 존스에게 영화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노라 존스는 기타를 들고 촬영장에 도착해 틈틈이 음악을 작곡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모르겠네(I don't know how to begin)'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I don't know how it will end)'라는 가사는 사랑을 잃은 이의 애끓는 심정을 그대로 전해준다.

 

 

여기에 ‘파리, 텍사스’의 라이 쿠더가 가세해 ‘Ely Nevada' 'Long Ride' 'Burside' 등 멤피스를 거쳐 네바다, 라스베이거스를 잇는 여행자 엘리자베스의 느낌을 블루스 테마로 들려준다.

엘리자베스는 지독한 사랑의 열병에 걸린 군상들을 만나면서 상처를 치유한다. 자신을 떠난 아내를 잊지 못하는 경찰 어니(데이빗 스트라다인)와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아내(레이첼 와이즈), 사랑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레슬리(나탈리 포트만)를 만나며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랑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엽서에 적어 제레미에게 보낸다. 수천 마일 거리에서도 제레미는 엘리자베스의 향기를 느낀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키스 장면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카페에서 파이를 먹던 엘리자베스가 입에 크림을 묻힌 채 잠이 든다. 카메라는 꿈결에 빠진 그녀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클로즈업하고, 따스한 숨결이 스크린 밖까지 느껴진다. 키스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입술이다.

 

 

카메라의 각도와 입술의 위치, 자세가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가장 아름다운 키스를 위해 짧지만 이틀에 걸쳐 찍었다고 한다.

 

 

 

주인을 잃은 열쇠를 버리지 않고 항아리 가득 모아둔 제레미에게 “왜?”냐고 엘리자베스가 묻는다. 제레미는 얘기한다. “열쇠를 버리면 영원히 그 문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아서.”

홍콩이 아닌 미국에서 찍은 이 영화에 대한 혹평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미로운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누군가와 참으로 따뜻한 키스를 나누고 싶은 느낌을 갖게 하는 것만으로도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충분히 예쁜 영화다. 94분. 12세 관람가.

 

김중기기자 / 대구매일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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