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정형시조와 시조의 정의

cassia 2006. 1. 4. 05:18
정형시조와 시조의 정의

서론

당대인은 선조께서 물려주신 유산을 잘 갈무리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책무가 있다.세계 그 어디 곳에 내어놓아도 전혀 손색없는 시조가,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어두운 이들에 의해 파괴되어 걸레조각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생각을 하니 그저 눈앞이 캄캄한 따름이다. 시조당선작이 옆에 게재된 동시보다 못하다는 쑥덕공론이 있고 자유시와 변별이 안 되는 현실에서 신문사들이 있던 지면도 폐지해버리는 수모를 겪었다하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국어사전에 정형시는(定型詩) "자수(字數). 구수(句數). 음의 성질에 따른 위치 등이 일정하게 정해진 시"라 하였고, 시조는(時調)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라 하였다. 그러나 시조는 정형시가 아니다. 정형시는 자수율로(字數律) 판가름하는 것이지 구수나(句數) 음보(音步) 음의 성질에 따른 위치 등으로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다. 정형시는 자수에 단 한자에 가감도 허용되지 않는다. 자수에 단 한자의 가감도 허용되지 않는 중국에 한시(漢詩) 일본에 단가(短歌)가 곧 정형시다. 시조는 초창기부터 자수에 여유를 둠으로서 정형시 대열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정형시 범주에 "구수(句數). 음의 성질에 따른 위치 등"을 무리하게 삽입한 것은 아전인수격 냄새가 짙다. 다른 나라 자국어 사전에는 정형시를 "구수(句數). 음보(音步). 음의 성질에 따른 위치 등"으로 정의 되어있지는 않을 것이다. 정형시의 근본인 자수율을(自數律) 배척하고, 아전인수격으로 구수와(句數) 음보를(音步) 내세워 "시조는 정형시다" 주창하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사기 당한 것이다. 비록 역사는 바르게 가르치지 못할망정 시조만큼은 바르게 가르쳐서야 옳았다.

일제 때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시조는 좋은 표적이 되었다. 일제 36년 간 단절된 시조가 해방과 함께 부활되었다. 민족유산으로 시조가 부활된 것은 미친년처럼 춤추고 싶은 일이다. 허나 시조를 육성하여 계승시켜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과 그 추종자들은 아직 독립되었음을 모르는가 한국어말상정책 하수인이 되어 "고시조 어투와(우노라, 하누나, 없노라, 하노라, 찾노라, 오누나) 문어체는(주었관데, 보냈관데, 지노나니, 가렸관데) 현대시조에는 써서는 안 된다고 확성기로 떠들고 있다.

무릇 문학이란 모국어로 써야한다.

시조 단에서 고어라 치부하는 "우노라, 하누나, 없노라, 하노라, 찾노라, 오누나" 와 "주었관데, 보냈노라, 지노나니, 가렸관데" 문어체는 한국사람이라면 딱히 국어사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뿌리를(고어) 부정하면 현대어도 부정되어야 한다. 자유시단도 고어와 문어체를 금지하는 지는 몰라도, 유독 시조 단은 고어와 문어체에 대해 과민반응이다. 3.8선 가르듯 시조를 고시조와 현대시조로 분류한 무리들이 고시조 문학성에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나머지 궁여지책으로 고시조의 근간인 "고어"와 "문어체" 사용을 금지시켜 놓았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그들은 그들의 작품에 남겨놓았다. 고시조를 사장시키기 위해 "고시조 어투는 아무리 작품성이 좋아도 현대시조 단에서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는 등 여러 증거와 해방이후 수적으로는 이조시대와는 비교되지도 않을 정도로 훨씬 많은 수많은 시조시인들 작품에서 명 시조를 구하기란 그야말로 솔밭에서 바늘 찾는 것 보다 어려운 정황을 내세워 시조를 시대적 분류로 고시조와 현대시조로 나누었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작금 시조 계 현실을 어떠한가.

화두에 당대인은 선조께서 물려주신 유산을 잘 갈무리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책무가 있다 하였다. 허나 시조를 발전 육성시킨다는 명분아래 인품을 돋보이고자, 혹은 품격 높은(?) 사교장을 만들고자 시조를 다만 도구로 사용하는 무리가 있어 뜻 있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사명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자질 없는 자는 자신의 능력에 맞게 시조를 재단하고자 필을 던져 버리고 언행불일치의 망치를 들고 시조를 파괴하고 있다.

시조의 자수율을 넘지 못한 이들은 " 현대인들은 복잡다난하기에 43자 내외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며 시조의 생명인 자수를 파괴하더니 급기야 옵니버스 시조등 국적불명의 이단적 시조를 탄생시켰다. 인생 사 희로애락이 고대와 현대가 다를 리 없다. 설령, 시조가 이조백자나 고려청자처럼 사라진다해도, 인간의 희로애락은 불변의 것이기에 억만년이 흐른다해도 변질되지는 않는다. 시나 시조는 심적 산물이다. 심적인 것이 시나 시조를 견인한다해도 실언은 아닐 것이다. 시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심적인 것 중 누구나 반듯이 거쳐가야 하는 관문인 사랑을 축출하여 보자. 수많은 나날 남몰래 속태우며 지새우던 고대인의 사랑과 현대인의 인스턴트 사랑을 계랑 하면 어느 것이 깊고 무겁겠는가? " 현대인들은 복잡다난하기에 43자 내외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 발상 자체는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43자 내외의 시조에 담을 수 없다면 詩를 쓸 일이지, 되니 안 되니 시조를 탓하며 겉돌 필요는 없다.

시조협회는 말사로(末寺) 전략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

수 백년을 이어 왔고 면면히 흘러 갈 우리민족 문화 유산인 시조에게 그 흔한 회관 하나 없다. 춘추전국시대처럼 난립한 계파들은 머리 수 채우는데 혈안이 되어 무분별하게 자질 없는 시조시인들은 양산하여 스스로 시조의 격을 떨어트려 놓았다. 어느 계파는 시조의 세계화라는 미명아래 한 해에 세계어린이시조시인을 260명이나 배출하였으니 새삼 일러 무엇하리, 전 국민이 더 나아가 전 세계인이 시조시인이 된다면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박수 쳐야 할 일이다. 허나 현 추세라면 날아가는 까마귀도 시조시인 인증서를 입에 물고 거들먹거리며 오락가락 날아다닐까 그것이 두렵다. 이르나니 시조가 그리 만만한 것이더냐? 時調의 時자도 모르는 주제에 지도자입네 거들먹거리며 시조를 학살하는 처사는 아무리 고쳐 생각해 봐도 매국노나 할 짓이라 도저히 보아 줄 수 없다.

시조 계는 배타성이 심하다.

사이비 단체가 많은 까닭이기도 하지만,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시조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징기스칸은 "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여는 자는 흥한다" 고 경고하였는데, 시조다운 단시조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소인배들이 성을 쌓고 있다. 윤선도나 황진이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고자 천계에 가기 위해 성벽을 쌓는다면, 나도 돌 조각 들고 발벗고 나설 일이다. 망루에는 열린 마당이란 깃발이 휘날리고 있지만 성주로 군림하는데 지장이 있다하여 쓴 소리 게시물이나 심지어 작품과 댓 글 마저 삭제로 일관하는 성주의 작태는 분노에 앞서 연민의 정을 느낀다. 시조시인 작품을 자유시 잣대로 재어 보고 허탈한 심정을 느낀 이가 비단 나뿐이랴. 자유시단에서 낙오된 자를 구제하기 위해 시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중에 꽃이요 왕이 되어야 할 시조가 자유시단에서 한낱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독자에게 문전걸식한들 밥 한 숟가락인들 얻어먹을 수 있겠는가?

소시 적 늑대소년이란 글을 읽었다.

밀림지대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생존자는 젖먹이 한 명뿐이다. 젖먹이는 늑대 젖을 먹고 늑대와 함께 생활했다. 늑대소년을 포획하고 보니 형상은 인간이나 네 발로 뛰고 소리도 늑대소리다. 현대시조도 늑대소년과 같다. 두 발로 걷지 못하고 사람 말을 하지 못하는 늑대소년처럼 현대시조도 그리 하다. 인간은 인간의 말을 하여야한다. 시조도 그리 하여야한다. 인간이 인간의 말을 하여야 하는 것처럼 시조도 시조로 말하여야 한다. 쌀보다 돌이 많은 가마니를 쌀가마니라 하는가? 비록 쌀가마니라 하더라도 쌀보다 돌이 많으면 돌가마니라 한다. 이제 돌가마니에서 돌을 축축하여 쌀가마니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시조시인이라는 명함을 뿌리는 자들의 사명인(使命) 것이다.

시조는 무엇인가?

산문을 압축한 것이 시라면, 시조는 시를 압축한 것이다. 시조는 자유시에는 없는 험한 산을 여러 개 넘어야 한다. 첫번째 산이 자수율(字數律)이요. 두번째 산이 음보(音步)요. 세번째 산이 구(句)요. 네번째 산이 장(章)이요. 다섯번째 산이 내적(內的)요건 이요. 여섯째 산이 작품성이다. 다섯째 산은 "시조는 시가 될 수 있어도 시는 시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수율(字數律), 음보(音步), 구(句), 장(章)을 준수했어도 내용이 시적(詩的)인 것은 시조가 될 수 없다.

시조는 정형시가 아니다.

시조의 지킴이라 자부하는 이들은 마땅히 시조의 뿌리인 자수율을 튼튼히 하고 꽃이 피기를 기다렸어야 옳았다. 자신의 능력에 맞게 자수율을 제 멋대로 취급들 하였으니 기형적 시조가 탄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여러 계파가 사심을 털고 한 자리에 모여, 시조의 틀을 확립하는 것은 남북이 통일되는 것 보다 참으로 어려워 보인다. "부득이한 경우 자수율을 무시해도 된다"는 코메디와 "비정형이 정형이요 정형이 비정형이다" 하여 소도 웃게 하는 재주로는 시조를 웃게 할 수 없다. 이제 시조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시조와 자수율에 관한 구구한 학설과 구질구질한 궤변에 사형을 선고하고 정형시조를 창시함과 아울러 정형시조와 시조의 정의를 기술하는 바이다.

시조를 위한 길이라면,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이겠다 "는 악역은 내가 맞겠다. 언젠가는 "울지 않는 두견새를 울도록 만들겠다"는 사람이 반듯이 나타나 시조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일본에 국시인(國詩) 단가(短歌)처럼 우리의 시조도 국시로(國詩) 승화시키리라 굳게 믿는다.



정형시조와 시조의 요건 : 3장(章), 6구(句), 12음보(音步).
정형시조와 시조의 세부적 요건 : 1, 자수(字數) 2, 구성 3. 내적(內的) 4, 흐름 5, 맥



정형시조의 요건

자수

[초장] 3 / 4 / 3 / 4
[중장] 3 / 4 / 3 / 4
[종장] 3 / 5 / 4 / 3 자수(字數)는 43자로 한다.

구성

각 장(章)마다 공히 음보(音步)와 구(句)가 명확하여야 한다.
시조는 12 음보(音步) 6구(句) 3장(章)으로서, 각 구(句)마다 하나의 문장이 되어야 하며, 3장(章)은 각 장마다 내용이 구분되어야 한다.…. 내적
고어와(古語-) 문어체를 금하지 않는다.
시적(詩的)인 것은 배제한다.†, 흐름
강물처럼 흘러야 한다.‡, 맥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이루어져야 한다.
난해한 작품의 해설은 억지 춘향 격은 안 되며, 작품과 한치에 오차도 없어야 한다.



단시조의 요건.

자수
[초장] 3 / 3~4 / 3~4 / 3~4
[중장] 3 / 3~4 / 3~4 / 3~4
[종장] 3 / 5~7 / 3~4 / 3~4
자수(字數)는 최하 41자, 최고 45자로 한다. 구성 3. 내적(內的) 4, 흐름 5, 맥은 정형시조와 같다



연시조(聯時調) 의 요건.

자수(字數)

연시조가 정형시의 자수율(字數律)을 준수하였을 경우 최상으로 한다.
연시조는 자수율에 야간의 여유를 둔다.
[초장] 3 / 3~4 / 3~4 / 3~4
[중장] 3 / 3~4 / 3~4 / 3~4
[종장] 3 / 5~7 / 3~4 / 3~4
자수(字數)는 최하 41자, 최고 45자로 한다.

구성
각 장(章)마다 공히 음보(音步)와 구(句)가 명확하여야 한다.
각 구(句)마다 하나의 문장이 되어야 하며, 3장(章)은 각 장(句)마다 내용이 구분되어야 한다.
각 연(聯)은 독립되어야 한다. 아래 연이 위의 연(聯)을 이어 받을 수 없다.…. 내적(內的) 4, 흐름 5, 맥은 단시조와 같다.



* 참고

< 제 1 구> < 제 2 구>
( 1음보 )( 2음보 )( 3음보 )( 4음보 )
초 장 3 4 3 4
중 장 3 4 3 4
종 장 3 5 4 3




- 후기 -

정형시조가 시조의 자손임을 천명하고자. 자수율을 학창 때 배운 시조의 틀로(초장 3/4/3/4 중장 3/4/3/4 종장 3/5/4/3 합계 43자) 하였다. 정형시조와 시조의 범위를 넓히고자 내적(內的) 요건에 시적인(時的) 것도 용인하러 하였으나 " 시조로 표현할 작품과 시로 표현할 작품이 따로 있다"는 박재삼의 말에 동의하여 행여 시조의 정체성에 흠집이 생길까 두려워 배제하였다. "너의 나라에도 정형시가 있는냐" 는 외국인의 묻는다면, 구질구질하게 구수(句數)나 음보(音步)를 내세우지 않고, 나라도 "있노라" 당당히 대답할 수 있음이 그저 좋을 뿐이다. 끝으로 오직 시조의 육성과 발전을 위해 오늘도 노심초사하시는 참다운 시조시인을 덤터기로 욕보이게 됨을 엎드려 사죄 말씀드리며 이만 두서 없는 필 놓는다.

정형시조가 될 수 없는 것을 나의 졸 시로 예를 든다.

필력(筆力)

두타는 사언이요 청옥은 시습이라
태백은 접어두고 무릉반석 갔더니
쌍폭이 길길이 뛰며 물렀거라 하더라

두타(두타산) 사언(양사언) 청옥(청옥산) 시습(김시습) 태백(태백산맥) 무릉반석(양사언의 석각(石刻)과 김시습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시가 1,500여평의 무릉반석에 새겨있다) 쌍폭(각각 20여m의 거대한 물줄기가 좌우에서 굉음을 토하며 쏟아져 내려 장관이다)
해석 : 자신의 작품이 제 아무리 명시라 해도 닫지 못한다.

* 자수는 정형시 자수에(43자) 맞으나, 중장 3과 4가 음보의 자수에 걸려 정형시조가 될 수 없다. 중장 " 태백은 접어두고 무릉반석 갔더니"를 " 태백은 접어두고 반석에 갔었더니"로 하면 정형시 요건인 자수(字數), 구성. 내적(內的), 맥은 맞으나 흐름에 걸려 정형시조가 될 수 없다.

불심(佛心)

반석에 묵객들은 용추되어 떠나는데
삼화사 풍경소리 부도서 우물터라
두타가 아니 떠나니 갈 수 없다 하더라

반석(무릉반석) 용추(용추폭포) 삼화사(三和寺) 부도(불상이나 불탑이 즉 부도인데 일반적으로 부도라 하면 일련의 묘탑(墓塔)을 말한다) 두타(두타산)

해석 : 불심이 옅은 것은 언젠가는 부처 곁을 떠나지만, 불심이 깊은 것은 떠나지 않는다.

* 단 한자가 많아 정형시조라 할 수 없다. 초장 "용추되어"를 "용추 돼" 로 하면, 정형시조라 할 수 있으나 흐름에 걸리다.

無明(13)

불혹에 고개 넘어 지명에 이르러서
이순을 훔쳐봐도 앞선 이 아니 뵌다
그 님도 나와 같고 야 쉬지 않고 가셨도다

해석 : 돌아가신 어버이가 그리워서, 불혹에(40) 고개를 넘고 지명의(50) 고개를 넘어 달려갔지만 보이지 않아 이순을(60) 훔쳐봐도 어버이는 보이지 않으니, 어버이도 나와 같이 보고싶은 님이 있어 나를 기다려 주지 않고 쉬지 않고 가셨도다.

* 종장 "가셨도다"를 "가셨다"로 하면 정형시조가 될 수 있으나 "가셨다" 보다 "가셨도다"가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정형시조가 되기를 포기하였다.

한가위

들녘이 익어가니 산도 익고 강도 익고
한가위 익어가니 별도 익고 달도 익고
처녀들 강강술래에 총각들 달떠 익고

오곡이 익어가니 소도 익고 말도 익고
동무가 익어가니 너도 익고 나도 익고
친정 길 저 아낙네에 마음도 달떠 익고

풀벌레 익어가니 다래 익고 머루 익고
단풍이 익어가니 묵(墨)도 익고 필(筆)도 익고
명월에 기러기 떼라 풍월이 달떠 익고

* 각 연의 1장과 2장들은 장을 바뀌거나 타 연 1장과 2장에 넣어도 무리가 없으므로 올바른 연 시조라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