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류시화, 「모란의 연(緣)」(낭송 신혜정)

cassia 2013. 7. 2. 03:34

    류시화, 「모란의 연(緣)」(낭송 신혜정)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우리 둘만이 아는 봄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부터
    멀리 있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당신으로 인해 스무 날하고도 몇 날
    불탄 적이 있다는 것을
    이 모란이 안다
    불면의 불로 봄과 작별했다는 것을 

     

    시_ 류시화 – 한국일보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뒤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인도 사상에 심취한 그는 여행과 명상을 통한 자기 탐구의 길을 걸으며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등을 발표했다. 잠언 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치유 시집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을 엮었으며, 명상서적을 소개해 오고 있다. 인도 여행기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를 썼다.
     
    낭송_ 신혜정 – 시인.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라면의 정치학』이 있다.
     
    출전_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 클릭『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문학의숲)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정정화
     
    ● 프로듀서_ 김태형

     

     

    류시화, 「모란의 연(緣)」을 배달하며
     

       어느 봄날 비운 지 오래인 집을 찾았는데 빈 집 마당에 작약이 찬란하였습니다. 나는 그만 울컥 치미는 꽃을 겨우겨우 내리 눌렀습니다. 아무 보는 이도 없는데 이토록 찬란하게 피었느냐! 그때 나는 사랑이라는 저승을 다녀오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그 꽃들과 오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해마다 작약 철이면 앓아눕는 병이 생겼습니다.


       여기 사랑하는 사람 대신 모란꽃만 자주 보고 온 사람이 있습니다. 모란이란 꽃은 오래 바라보면 그대로 그 꽃빛이 눈가에 번지는 꽃입니다. 봄날 갑자기 눈가가 붉어진 사람이 있다면 붉은 모란을 오래 바라본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 사랑은 떨어져 흩어지기 일쑵니다.


       시에서도 이런 순정한 사랑시가 맥을 못 추는, 자극적인 시대가 되었습니다만 어디에선가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무는’ 모란을 가꾸며 저승 소식도 배우면서 살아가는 이가 있을 겁니다. 그를 만나고 싶습니다.

     

    문학집배원 장석남 /  원문 ☞ 류시화, 「모란의 연(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