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못을 뽑으며 - 주창윤

cassia 2013. 2. 25. 03:47
[하루를 여는 시 한편] 못을 뽑으며 - 주창윤


이사를 와서 보니
내가 사용할 방에는
스무여 개의 못들이 필요 이상으로 박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어디에라도 못을 박는 일
내가 너에게 못을 박듯이
너도 나에게 못을 박는 일
벽마다 가득 박혀 있는 못들을 뽑아낸다.
창 밖으로 벽돌지고 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못자국
그 깊이에 잠시 잠긴다.
뽑음과 박음, 못을 뽑는 사람과
못을 박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못을 뽑고 벽에 기대어 쉬는데
벽 뒤편에서 누가 못질을 한다.
―주창윤(1963~ )

새 방에는 아무것도 들이지 않으리라 다짐해도 곧 이것저것 늘어난다. 물건이 늘어나고 생각도 늘어난다. 미처 몰랐던 사실들이 드러나며 근심도 늘어난다. 물건은 바닥을 다 메우고는 벽으로 기어올라가기 시작한다. 하나씩 못이 늘어난다. 넝쿨식물처럼 못을 타고 올라가는 갖가지 누추한 생(生)의 징표들. 새로 만나는 사람도 방과 같다. 처음엔 아무 선입견이나 편견 같은 것이 없어서 신선한 메아리도 살았지만 곧 나의 온갖 욕망의 잡동사니들이 걸린다. '나'라는 방에도 타인들의 못들이 가득하다. 내 맘대로 빼지지 않는 것이 비극이다. 입춘이 지났다. 심실(心室)의 못을 다 빼고 도배를 한다. 다시는 못을 박지 않으리라! 그저 비워서 잠시 앉아다 가는 것들만 들이리라. 그게 생(生)이니까.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배경 음악은 데이드림(Daydream)의 'Love Is... Part1'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