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허수경, 「해는 우리를 향하여」(낭송_ 천수호)

cassia 2013. 2. 4. 17:08

    허수경, 「해는 우리를 향하여」(낭송_ 천수호)

     

     

     

    허수경, 「해는 우리를 향하여」
     

       까마귀 걸어간다
       노을녘
       해를 향하여

     

       우리도 걸어간다
       노을녘
       까마귀를 따라

     

       결국 우리는 해를 향하여,
       해 질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해 뜰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갔던 이들도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나이 어려 죽은
       손발 없는 속수무책의 신들이 지키는 담장 아래 살았던 아이들

     

       단 한 번도 죄지을 기회를 갖지 않았던
       아이들의 염소처럼 그렇게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날아가던
       해 뜰 무렵

     

       아이와 엉겨 있던 염소가
       툭 툭 자리를 털면서

       배고파, 배고파, 할 때

     

       눈 부비며 염소를 안던
       아이가 염소에게 주던 마른 풀처럼
       마른 풀에 맺힌 첫날 같은 햇빛처럼

     

       시_ 허수경 – 1964년 경상남도 진주 출생. 시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혼자 가는 먼 집』『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장편소설 『모래도시를 찾아서』『아틀란티스야 잘 가』『박하』,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등이 있음.

       낭송_ 천수호 – 1964년 경북 경산 출생.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이 있음.
       출전_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
       음악_ Digital Juice – BackTraxx
       애니메이션_ 송승리
       프로듀서_ 김태형

     

     

       허수경, 「해는 우리를 향하여」를배달하며

     

       몇 사람인가 일행과 함께 화자는 해질녘 빈 들판을 걸어가고 있다. 저만치 앞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어쩌면 두서너 마리가 뒤뚱거리며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다. 엷어지는 긴 그림자를 끌고, 노을로 붉은 서녘 하늘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까마귀와 사람 들. 어쩌면 까마귀는 이내 푸드덕 날아갔을지도 모르지만, 지는 해의 역광으로 불그스름 물든 까마귀가 해 지는 쪽으로 한 발 한 발 내딛는 뒤태를 보는 순간 화자는 죽음의 행렬을 떠올린다.
       ‘결국 우리는 해를 향하여,/해 질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이렇게도 죽고 저렇게도 죽고, 젊어서도 죽고 늙어서도 죽고, 죄를 져도 죽고 죄 없이도 죽는다.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은 그 자체가 폭력이지만, ‘해 뜰 무렵해를 향해 걸어갔던 이들’에게는 더 폭력적이다. 시에서 ‘해 뜰 무렵’은 이중적으로 쓰인다. 생명의 따뜻한 빛인 해가 몸에 막 깃든 햇생명의 시간, 그리고 실제로 일출 무렵.
       ‘폭탄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날아가던/해 뜰 무렵’, ‘해를 향하여 걸어갔던’ 아이들!
       환하게 밝은 하늘 아래 부끄러움도 거리낌도 두려움도 없이 벌인, 군인들의 그 무자비 무차별한 살상의 결말을 시인은 분노와 슬픔을 가누며, 공들여 염하듯 평화롭고 아름답게 그린다. 신들도 부모도 그 누구도 보호해 주지 못한 어린 목숨들…….
    독일에서 오랜 시간 ‘고대 근동고고학’(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을 공부한 시인이 여름이면 두어 달씩 발굴을 목적으로 가 있던 유적지 마을이 시의 배경일 테다.

     

    문학집배원 황인숙 /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