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김혜순, 「잘 익은 사과 」(낭송 문지현)

cassia 2010. 9. 20. 04:17
김혜순, 「잘 익은 사과 」(낭송 문지현)
    김혜순, 「잘 익은 사과 」(낭송 문지현)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 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 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 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출전 :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문학과 지성사) 김혜순, 「잘 익은 사과 」를 배달하며 크고 잘 익은 햇사과를 사각사각 깎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사과에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나요? “천 년 동안 아가인 사람의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나요? 둥글게 둥글게 껍질 깎이는 자리가 자전거타고 상쾌하게 지나가는 좁고 구불구불한 시골길 같지 않나요? 시는 말로 되어 있고, 그 말은 사물을 닮은 가짜이지만, 시인의 욕망은 독자에게 ‘사과’라는 말이 아니라 진짜 사과를 주는 것. 그러므로 이 시를 즐기려면 사과라는 '말'을 버리고, 눈과 코와 귀의 감각을 최대한 확장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둥글게 깎이는 작은 사과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내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로 바뀌는 마술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벽산책 시와 그리움 / 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