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憧憬

[스크랩] [애송시 100편-제31편] 사라진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21~30편)

cassia 2008. 2. 11.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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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 100편-제31편] 사라진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

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

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

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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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권신아

'그대'는 어떻게 '당신'이 되는가. 허수경(44) 시인은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라고 한다. '사내'가 아름다울 때, 그 아름다움에 기댈 수 있을

때 '당신'이 되기도 한다. 부빈다는 것, 기댄다는 것, 그것은 다정(多情)이고 병(病)

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병자처럼 당신을 묻은 마음의 무덤에 벌초하러 간다. 사실은

슬픔으로 이어진 '살아옴의 상처'와,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며

한 병의 맨 술을 마시는 중이리라. 백수광부처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훌쩍 건너가

버린 당신! 당신이 먼저 당도해버린 그곳은 나 또한 혼자서 가야 할 먼 집이다. 그러

니 남겨진 나는 참혹할밖에.

참혹은 '당신'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총체적 참혹이다. 사랑을 떠

나 보낸 실연의 참혹, 아버지를 여읜 망부의 참혹, 신념을 잃은 한 시대의 참혹.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고 무를 수도 없는, 죄다 마음에 묻어야 하는 당신들이다.

그런 당신을 웃으면서 울면서 혹은 취해서 부르는 이 시의 언어는 언어 이전이거나

언어 이후다. 단속적인 말줄임표와 쉼표,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킥킥'이라는

의성어에는, 참혹인 줄 알면서도 참혹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자의 내면풍경이 고스

란히 드러나 있다.

나와 당신, 사랑의 마음과 마음의 무덤, 환후와 치병이 '각각 따로'이기에, 당신과

함께했던 세월과 사랑과 상처와 그 상처의 몸이 모두 적요이고 울음이다. 그런 울음

을 짊어지고 가는 시인, 세간의 혼몽을 잘 먹고 잘 노래하는 시인이야말로 자신의

불우함을 다해 노래하는 시인의 지복(至福)일 터, 이 시는 그 지복의 한 자락을 걸쳐

입고 있다.

허수경 시인은 울음 같은, 비명 같은, 취생몽사 같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낸

직후 독일로 휘리릭 날아가버렸다. 1990년대 초반이었고, 시인의 생부가 돌아가시

고 난 직후였다. 동안(童顔)에, 대책 없는 맨몸이었다. 고고학을 공부한다 했다.

잘살고 있다고 했다. 독일로 날아간 지 벌써 16년째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은

언제 불러도 참 좋다, 그리고 참 참혹하다, 킥킥 당신….

 

정끝별·시인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출처 : 늘 푸른 예동(霓童)네 *^^*
글쓴이 : 데미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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